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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에서 만난 묻힌 역사들(유학의 고장, 거창 양민 학살사건, 균열과 회복의 길)

by see-sky 2025. 5. 15.

거창 수승대 사진
거창 수승대

경남 거창은 조용한 산골의 이미지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푸른 물이 흐르는 수승대, 덕유산 자락에 안긴 고요한 마을들, 그리고 남계서원 같은 유서 깊은 서원이 어우러져 전형적인 선비의 고장처럼 보이곤 합니다. 그러나 이 작은 고을은, 우리가 알지 못했던 크고 무거운 역사들을 품고 있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조선의 학문이 살아 숨 쉬었고, 또한 한국 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장면 중 하나가 펼쳐졌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관광지로서의 거창이 아닌, 기록되지 않았거나 말해지지 않았던 ‘기억의 공간’으로서의 거창을 함께 걸어보겠습니다.

수승대 아래 흐르던 사색 – 거창, 유학의 고장이 되기까지

수승대는 많은 분들께 ‘자연명소’ 혹은 ‘유람지’로 익숙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이곳은 단순한 물놀이 장소가 아니라, 조선시대 선비들이 모여 학문을 논하고 정치를 이야기하던 정신적 공간이었습니다. 특히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유학 계보가 교차하는 거창 지역은 경상도 내에서도 학문적 위상이 높았고, 남계서원, 거창향교, 수승대 누정 등이 이를 뒷받침해 줍니다.

수승대는 이름 그대로 ‘스승을 따르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이곳에서는 유생들이 봄과 가을에 모여 강학을 열고 시회를 열었습니다. 거창은 교통이 불편한 내륙 산간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유림 간 교류가 활발했고, 경북 안동, 예천과 함께 남부 유학의 핵심 지역 중 하나로 꼽혔습니다.

특히 남계서원은 1552년 사림파 학자인 정여창을 배향한 곳으로, 나라에서 공인을 받아 운영되던 사액서원 중 하나였습니다. 유림들은 이 서원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선현의 정신을 전하는 일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지금도 남계서원에 가면, 마당의 돌담과 회랑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에서 조용히 공부하며 사색하던 선비들의 발자취를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거창은 이렇게 ‘작지만 깊은’ 유학의 전통을 지닌 고장이며, 그 사상적 바탕은 이후 거창 지역에서 수많은 의병과 애국지사가 탄생하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조선의 문맥이 끊기지 않고 이어졌던 이곳의 역사는, 곧 한국 근현대사의 격랑을 맞이하며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됩니다.

숨죽인 골짜기에서 들려오는 비극 – 거창 양민학살 사건

1951년,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그 해 겨울, 경남 거창군 신원면 일대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거창 양민학살 사건’이라 불리는 이 비극은 당시 국군 제11사단이 빨치산을 돕는 혐의로 지역 주민 700여 명을 불법으로 체포하고, 그중 수백 명을 처형한 사건입니다. 피해자는 대부분 여성과 아이, 노인이었습니다.

당시 군은 이 사건을 은폐하려 했고, 언론 보도와 유족의 저항으로 인해 일부 사실이 드러났지만 그 진상은 지금까지도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거창은 이 사건 이후 오랫동안 ‘침묵의 땅’이 되었고, 피해자 가족들은 지역사회에서 말조차 꺼낼 수 없는 분위기 속에서 기억을 가슴에만 품고 살아야 했습니다.

현재 신원면에 위치한 ‘거창사건추모공원’은 그 역사를 기리고자 만들어진 공간입니다. 공원 내에는 위령탑, 기록관, 전시관 등이 조성되어 있으며, 방문객은 이곳에서 단지 전쟁의 참상뿐 아니라 국가폭력에 희생된 민간인의 아픔을 조용히 마주할 수 있습니다.

추모공원에 들어서면, 사람들의 말소리는 자연스레 낮아지고, 기억의 무게가 걸음마다 얹히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거창사건은 단지 지역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한국 근현대사 속에서 아직도 제대로 치유되지 못한 ‘말 없는 상처’의 상징이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적 교훈입니다.

작지만 깊은 마을 – 거창이 전하는 시대의 균열과 회복의 길

거창은 유교적 전통과 현대사의 비극이 동시에 공존하는 도시입니다. 이 두 층위는 서로 충돌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의 시간 축 위에서 맞물려 돌아가는 ‘거창이라는 고을의 정체성’을 만들어냈습니다.

거창은 외형적으로 큰 도시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남명학파의 도의정신, 의병장의 결기, 그리고 말하지 못한 유족의 침묵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한국사에서 보기 드물게 고전과 현대가 함께 앉아 있는 장소라 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는 거창문화원이 중심이 되어 지역의 역사와 기억을 다시 해석하고, 교육자료와 전시를 통해 다음 세대에게 전달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또한 청년 작가들과 예술가들이 이 지역에 머물며 ‘말하지 못한 역사’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시도들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거창읍 골목 곳곳에는 옛 군사시설을 리모델링한 전시공간, 지역 청년들이 운영하는 카페, 순례자들을 위한 쉼터 같은 작지만 상징적인 공간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거창의 역사는 계속 쓰이고 있습니다. 돌 아래에 숨겨졌던 기억이 다시 말해지고, 조용했던 산이 다시 응답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작은 고을이 들려주는 큰 이야기들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무엇을 잊지 말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조용히 물어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