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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기와 정이 함께 밴 밥상, 남해를 먹다 – 경상남도 바닷가 음식 기행

by see-sky 2025. 3. 23.

멸치 쌈밥 사진
멸치 쌈밥

경상남도는 바다와 함께 살아온 고장이며, 그 삶은 고스란히 밥상 위에 드러납니다. 바람과 소금, 갯벌과 해류가 만든 음식은 간단하지 않으면서도 정겹고, 소금기가 묻은 생선 한 점, 된장에 찍어 먹는 쌈 하나에도 마을의 시간이 배어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남해, 통영, 고성, 사천, 거제 등 경상남도 남부 해안선을 따라 이어지는 바닷가 음식들을 중심으로, 단순한 맛이 아닌 ‘정서와 풍경이 담긴 한 끼’의 의미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남해안의 바람이 만든 밥상, 통영과 고성에서 만난 바다의 맛

통영은 한국의 나폴리로 불릴 만큼 아름다운 항구를 품고 있지만, 그 진짜 매력은 바닷가 마을 골목에서 만나는 소박한 밥상에 있습니다. 이곳의 대표 음식인 다찌는 일종의 해산물 코스 요리로, 한 상 가득 펼쳐지는 수많은 반찬과 술안주들이 단순히 먹는 행위를 넘어 하나의 지역 문화로 정착되어 왔습니다. 다찌집에 앉아 있으면, 바다에서 금방 건져온 회와 장아찌, 불에 살짝 그을린 생선구이, 그리고 식사를 마무리하는 밥과 국까지 이어지는 전통의 순서가 있습니다. 다찌의 특징은 ‘메뉴판이 없고, 재료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입니다. 이 유연함은 그날의 바다를 그대로 식탁에 올리는 지역 어부와 식당 주인의 감각이 만들어낸 결과이며, 통영이라는 도시가 자연과 얼마나 가깝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고성에 가면 조금 더 투박하고 토속적인 맛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특히 삼산면 일대에서는 멸치젓으로 맛을 낸 미역국이 유명하며, 지역 어민들은 아침마다 미역을 삶고, 바로 잡은 전어로 젓갈을 담그는 일을 오랫동안 이어오고 계십니다. 이곳에서는 ‘짜다’는 말이 맛없음을 뜻하지 않습니다. 바다의 소금기와 시간을 함께 먹는 것이기 때문에, 젓갈과 된장, 해물국의 깊은 짠맛은 오히려 ‘정이 있는 맛’으로 기억됩니다. 고성 바닷가 근처의 작은 백반집에서는 미역무침 하나에도 손수 만든 참기름이 들어가고, 멸치볶음에 청양고추를 넣어 풍미를 더하는 ‘집밥식 반찬’이 기본으로 나옵니다. 이러한 밥상은 음식을 뛰어넘어 한 마을의 풍경이기도 합니다.

남해의 시간은 천천히 익는다 – 장어국, 멸치쌈밥, 생선조림의 풍경

경상남도의 남해안 지역은 시간이 느리게 흐릅니다. 그만큼 음식도 급히 만들지 않고, 오랜 기다림과 손질, 그리고 다듬어내는 인내 속에서 진정한 맛이 완성됩니다. 이 대표적인 음식이 바로 남해 장어국입니다. 남해는 예로부터 바닷장어가 많이 잡히는 곳이었고, 장어는 제사 음식이나 여름철 보양식으로 빠지지 않는 재료였습니다. 특히 물메기나 전복보다도 ‘서민 보양식’으로 사랑받았던 장어국은, 지금도 남해읍이나 창선면의 백반집에서 흔히 접할 수 있습니다.

장어국은 고춧가루로 국물을 붉게 내는 경상도식 매운탕과는 다르게, 된장과 들깨, 마늘로 국물을 고아내는 방식이 일반적입니다. 장어 특유의 비린 맛은 생강과 된장이 잡아주고, 들깨가루가 걸쭉한 식감을 더해줍니다. 이 국은 몸을 데우는 음식이라기보다, 마음을 채워주는 음식입니다. 고향의 맛을 찾는 이들에게 장어국 한 그릇은 소박하지만 든든한 위로가 되어 줍니다.

또한 남해안에서는 멸치쌈밥이 특색 있게 발달하였습니다. 멸치를 튀기거나 조려서 먹는 방식이 아닌, 간장에 절여 숙성한 후, 묵은지나 깻잎에 싸 먹는 형태로 즐기는 쌈밥 문화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것은 남해 특유의 ‘조용하지만 깊은 손맛’의 상징으로, 자극적인 양념 없이도 진한 밥맛을 만들어내는 기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거제나 하동 일대에서는 생선조림 문화도 발달해 있습니다. 특히 고등어나 갈치를 얇게 썰어 무, 다시마, 된장과 함께 천천히 끓여낸 생선조림은 기름기보다는 짭짤함과 감칠맛이 주된 매력입니다. 지금도 항구 근처의 식당에서는 생선의 상태를 보고 조림 여부를 결정하며, 조림 안의 무가 더 맛있다고 말하는 어르신들이 계십니다. 그 이유는 생선보다 무가 ‘국물의 정수’를 고스란히 흡수하기 때문입니다.

바닷가 밥상 위에 남은 풍경들 – 정이 된 음식, 음식이 된 정

경상남도 해안의 음식은 그 입으로 느끼는 맛이 아닙니다. 그것은 삶의 풍경이자, 말없이 전해지는 마음의 언어입니다. 바닷가 밥상에는 소금기와 함께 사람의 손길이 묻어 있고, 그 손길은 거칠지 않으며 따뜻합니다.

통영 다찌문화처럼 술과 반찬이 오가는 구조도, 남해 장어국처럼 시간과 인내로 완성되는 국물도, 모두 지역이 품은 삶의 방식입니다. 시장 골목에서 만나는 젓갈 한 통, 해풍 맞은 마늘장아찌 한 입, 밥상 위 멸치 한 마리까지—이 모든 것이 경남의 풍경이며,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기억으로 남습니다.

거창하거나 특별한 미식을 찾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경상남도는 조용한 밥상에서도 풍성함을 보여주는 땅이며, 그 밥상에는 자연의 손맛과 마을 사람들의 정성이 담겨 있습니다. 여행자 여러분께서 이 지역을 찾으실 때, 길가 작은 식당에서 내어주는 국 한 그릇과 쌈 한 접시를 마주하신다면 그곳이 바로 경남의 진짜 맛집임을 느끼시게 될 것입니다.

경남은 말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끼 밥상으로 모든 것을 이야기합니다. 소금기 어린 반찬, 오래 끓인 국, 한 조각 생선 위의 고추기름까지— 그 안에는 바람도 있고, 손맛도 있고, 사람의 정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남해를 밥상에 담은’ 경상남도 음식 여행의 진짜 매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