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끝자락, 격동의 근대기로 접어들던 시기, 한 인물이 그 중심에 서 있었습니다. 바로 조선 제26대 임금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 고종(高宗)입니다. 고종은 단순한 군주가 아닌, 역사적으로 매우 복합적인 인물로 평가받고 있으며, 그의 선택 하나하나는 한국 근대사의 향방을 가르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조선의 마지막 황제로서 고종이 걸어간 여정, 그 속에 담긴 근대화의 의지와 한계, 그리고 대한제국이라는 마지막 국가적 실험을 조명해 보겠습니다.
조선의 끝에서 근대를 고민하다: 고종의 배경과 시대 인식
고종(1852~1919)은 열세 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고, 그 초기 통치는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의 섭정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대원군의 강경한 쇄국정책과 수구주의 노선은 외세를 물리치는 데에는 일시적인 효과가 있었으나, 국제 정세의 흐름을 놓치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습니다. 고종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친정체제를 구축하고, 서양 문명과 기술을 도입하는 개화 정책에 눈을 뜨게 됩니다. 그의 눈앞에 놓여 있던 현실은 단순한 왕권 강화를 넘어, 국가의 존망이 달린 근대화의 길이었습니다. 청나라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일본이 급격히 부상하면서, 조선은 서서히 제국주의 열강의 표적이 되어 갔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종은 점차 개항, 신식 군제 도입, 우편·철도·전신 등 근대적 시스템 확립 등의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은 철저히 양날의 검이었습니다. 내적으로는 보수적 유림과 기존 권력층의 반발, 외적으로는 열강 간섭과 내정 간섭의 빌미 제공이라는 부작용이 동시에 나타났습니다. 특히 갑신정변(1884), 임오군란(1882)과 같은 사건은 고종이 처한 외교적 현실이 얼마나 복잡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고종은 그 시점에서 단순히 왕이 아닌, 역사적 책임을 짊어진 국가 경영자였습니다. 그가 추진한 개화정책은 분명히 필요했고 시의적절했으나, 준비되지 않은 사회 시스템과 엘리트 집단의 부재는 그의 개혁을 제도화하지 못하는 한계로 이어졌습니다.
황제로의 변신, 대한제국과 고종의 국가 재건 실험
1897년, 고종은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정하고 스스로 황제에 즉위함으로써 대한제국을 선포하였습니다. 이는 단순한 명칭 변경이 아니라, 조선의 왕에서 독립 국가의 황제로서의 위상 전환을 선언한 의미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실제로 이 ‘대한제국 수립’은 청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주독립을 천명한 첫 사례로서 역사적 가치가 큽니다. 고종은 황제로서 다양한 근대화 정책을 직접 추진하였습니다. 대표적인 예로는 탁지부 중심의 재정 개편, 원수부 설치를 통한 군제 개혁, 근대적 교육기관 설립(한성사범학교, 관립중학교 등), 독립신문 발간과 한글 보급 장려, 전차·전등·우편 제도의 도입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대한제국이 단순히 명목상의 국가가 아닌, 실질적인 근대 국가로 전환하려는 시도였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일본과 러시아가 한반도를 두고 치열한 외교 전을 벌이는 가운데, 고종은 일명 ‘중립 외교’ 전략을 펼쳤지만, 이는 곧 외교 고립이라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특히 을사늑약(1905)과 한일합방(1910)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고종의 정치적 외교적 실패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고종은 이러한 사태에 저항하여 헤이그 특사 파견(1907)이라는 국제 외교전을 시도했으나, 이는 오히려 일본의 반발을 사 강제 퇴위라는 비극으로 이어졌습니다. 결국 그는 황제에서 물러나 ‘이태황(李太皇)’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야 했고, 1919년 그의 서거는 전국적인 3.1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이렇듯 고종은 근대국가 수립의 꿈을 품고 스스로를 ‘황제’로 탈바꿈시켰지만, 내외적 한계 속에서 그 꿈은 실현되지 못한 채 역사의 안타까운 교차로에 멈추게 되었습니다.
역사적 평가와 오늘날의 시선: 고종은 과연 무능했는가?
고종에 대한 평가는 지금도 극과 극을 달립니다. 한편에서는 그를 근대화 실패의 주범으로, 또 한편에서는 구조적 한계 속에서 가능한 개혁을 추구했던 비운의 군주로 바라봅니다. 중요한 것은 이 평가들이 단순한 결과론이 아니라, 그가 처한 구조적 맥락을 충분히 고려한 입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입니다. 먼저, 고종은 단순히 수동적인 군주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당시 가능한 범위 내에서 서양 문물과 문명을 적극 받아들이고자 했고, 신문 발간, 교육 확대, 의료 도입, 외국 유학생 파견 등 다각도의 개화 정책을 시도했습니다. 서울 정동에 위치한 정동교회, 경운궁(덕수궁), 구 러시아 공사관 등은 그가 남긴 근대화의 물리적 흔적이자, 오늘날 답사 여행지로도 주목받고 있습니다. 또한 고종은 외교적 전략 면에서도 '헤이그 특사 사건'을 통해 국제사회에 대한 외교적 접근 시도를 했지만, 그 결과는 일본의 더욱 강력한 지배 논리로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그 의도 자체는 주권 회복을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었다고 재평가할 여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은, 고종은 완전한 실패자도, 완벽한 영웅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분명히 한계가 많았고, 그 한계로 인해 국민들이 큰 고통을 겪었지만, 동시에 한국 근대사의 초입에서 방향을 모색한 첫 번째 군주이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그의 유적지를 걷다 보면, 화려함보다는 어쩐지 고독과 고심의 흔적이 더 짙게 느껴집니다. 그러한 느낌은 단순한 동정이 아니라, 당시 그가 지녔던 고민과 선택들이 얼마나 역사적으로 무거웠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일지도 모릅니다.
고종은 조선이라는 왕조의 마지막 군주이자, 대한제국이라는 새로운 국가 실험의 창시자였습니다. 그의 행보는 오히려 오늘날의 우리에게 ‘한 국가가 근대를 준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깊은 질문을 던져줍니다. 조선의 끝자락에서 근대를 선택해야만 했던 군주의 흔적을 따라 걸으며, 우리가 잊고 있던 역사 속의 교훈을 다시 되새겨보는 여행을 시작해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