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배령은 야생화로 알려진 산입니다. 6월부터 8월 사이, 멸종 위기 식물과 고산 식생이 피어나는 이 고갯길은 많은 분들께 ‘생태 여행지’, ‘비대면 힐링 명소’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곰배령에는 단지 식물의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곳에는 백두대간을 넘나들며 삶을 이어온 사람들의 발자취가 있고, 분단 이후 침묵하게 된 산의 이면이 존재합니다. 이 글에서는 곰배령의 풍경 아래 숨어 있는 ‘사람의 시간’과 ‘지워진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조용한 역사기행의 여정을 소개드리고자 합니다.
꽃보다 먼저 지나간 사람들 – 곰배령이 품은 옛길과 생존의 흔적
곰배령은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와 양구군 해안면 사이, 해발 약 1164미터에 위치한 완만한 고갯마루입니다. 이곳은 과거 백두대간을 오가던 이들의 생활 통로이자, 고개를 넘으며 삶을 이어가던 민초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길의 유산’입니다.
과거 곰배령 일대는 산간 마을 주민들이 서로 왕래하던 중요한 통로였습니다. 지금은 등록을 통해 제한적으로 탐방이 가능하지만, 197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이 고갯길은 생필품을 나르던 짐꾼들과 약초꾼, 숯쟁이들의 일상 통로였습니다. 겨울이면 눈이 가득 쌓였고, 여름이면 뱀과 진드기가 들끓던 험난한 길이었지만,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이 길을 걸었습니다. 그 이유는 ‘다른 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삶을 위한 길은 언제나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이 고개를 넘던 사람들 중에는 이름 없는 장사꾼도 있었고, 병을 치료하기 위해 약초를 구하러 다니던 어르신도 있었습니다. 당시 인근 마을 주민들은 서로의 마을을 구분하지 않고, ‘같은 산에 사는 사람’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곰배령은 행정구역보다 먼저 ‘산으로 맺어진 공동체’를 만들었던 장소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전통은 1950년대 이후 급격히 단절되게 됩니다. 한국전쟁과 분단, 그리고 민간인 통제선의 설정으로 인해 곰배령은 ‘넘어서는 안 되는 산’이 되었고, 수십 년 동안 아무도 찾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사라진 자리에, 다시 식물이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야생화를 보며 감탄하지만, 그 땅을 걷던 사람들의 흔적은 대부분 잊힌 채 남아 있습니다.
침묵하는 산, 곰배령에 남은 분단과 경계의 기억
곰배령은 단지 아름다운 산이 아닙니다. 이곳은 한반도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백두대간에 위치해 있으며, 지리적으로는 비무장지대에서 불과 몇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접경의 산’입니다. 때문에 이 산은 오랫동안 말이 없었고, 사람을 들이지 않았으며, 조용히 자기만의 기억을 지켜왔습니다.
1953년 휴전 이후, 곰배령 인근은 ‘민간인 통제구역’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군사적 목적이 아닌, 주민들의 안전과 국가적 경계 유지를 위한 조치였습니다. 하지만 그 조치의 결과로, 이 산을 오가던 수많은 사람들의 삶은 단절되었고, 접경 마을은 점점 고립되어 갔습니다. 진동리, 방태산 자락의 마을들은 ‘산 아래의 섬’처럼 남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경계의 기억은 지금도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곰배령 등산로 초입의 검문소, 신분증을 제시하고 탐방예약을 확인해야만 입장할 수 있는 절차, 정해진 길 이외에는 들어갈 수 없는 제한 탐방— 이 모든 것들이 곰배령이 단순한 관광지가 아닌 ‘지정된 침묵의 공간’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하지만 그 침묵 속에서도, 이곳을 지켜온 지역 주민들과 환경보전 활동가들, 그리고 옛 산길을 다시 찾으려는 답사자들의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곰배령이 다시 열리기 시작한 것은 2007년 이후입니다. ‘생태탐방로’라는 이름 아래, 철저한 사전예약제와 입산 인원 제한을 통해 자연과 역사, 사람의 균형을 맞추려는 새로운 시도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 산을 오르며, 그저 풍경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이곳은 왜 이렇게 조용할까’라고 자문해 본다면, 곰배령의 역사는 훨씬 깊고 풍성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이 산은 침묵을 통해 말을 건넵니다. 그리고 그 말은, 우리가 듣고자 할 때에만 들리기 시작합니다.
꽃보다 조용한 기록 – 곰배령이 들려주는 작고 긴 이야기
오늘날 곰배령은 ‘걷는 산’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곳을 걷는 방식은 여느 산과는 다릅니다. 길을 벗어나면 안 되고, 정해진 구간 외에는 들어갈 수 없으며, 쓰레기 하나도 가져가야 하고, 야생화 하나도 만지면 안 됩니다. 그만큼 조심스럽고 조용한 산행이 요구됩니다.
이러한 조심스러움은 단지 생태적 보존을 위한 규칙이 아닙니다. 그것은 곰배령이라는 공간에 깃든 ‘기억에 대한 예의’이기도 합니다. 이 산에는 말을 아끼는 이들의 시간이 남아 있고, 그 길에는 걷다가 멈춘 누군가의 흔적이 묻어 있습니다.
곰배령을 걷다 보면, 중간중간 바위와 나무에 걸린 작은 팻말들을 보게 됩니다. ‘야생화 보호 구간’, ‘백두대간 생태 축’ 같은 안내문이지만, 그 아래 숨어 있는 메시지는 ‘이 길은 원래 누군가의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걷는 것과 모른 채 걷는 것은 산행의 밀도와 감정의 결이 전혀 다릅니다.
마지막 전망대에 도착했을 때, 눈앞에 펼쳐진 강원 산맥과 깊은 계곡들을 바라보며 많은 분들께서 ‘너무 조용하다’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곰배령의 조용함은 비어 있는 침묵이 아닙니다. 그 안에는 수많은 시간과 이름 없는 이들의 기억, 그리고 경계와 생존 사이를 걸었던 이야기들이 켜켜이 쌓여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곰배령을 찾으실 때, 단지 꽃을 보기 위한 산행이 아니라, ‘누가 이 길을 먼저 걸었는가’를 떠올리며 걸으신다면, 이 산은 단지 예쁜 풍경이 아닌 하나의 살아 있는 역사로 다가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