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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시장, 실향민의 시간과 공간이 응축된 살아있는 역사 박물관 (피란문화, 공간구조, 향토음식)

by see-sky 2025. 7. 13.

영화 '국제시장' 사진
영화 '국제시장' 포스터

부산 중구에 위치한 국제시장은 평범한 재래시장이 아닙니다. 이곳은 6·25 전쟁 이후 실향민과 피란민들이 터를 잡고 삶을 이어간 한국 근현대사의 생생한 현장이자,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도시문화의 축소판입니다. 전통시장이라는 공간을 넘어, 한 세대의 생존, 경제, 정체성, 그리고 음식문화까지 담아낸 국제시장은 지금도 숨 쉬는 ‘살아있는 역사박물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국제시장의 역사적 배경, 공간구조와 도시 생존전략, 그리고 실향민이 만들어낸 음식문화의 유산까지 깊이 있게 조명해 보겠습니다.

국제시장의 탄생: 피란민이 만든 도시 속의 또 다른 도시

국제시장의 시작은 6·25 전쟁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전쟁 발발 이후 수많은 피란민들이 부산으로 몰려들었고, 그 중심에는 남포동과 보수동, 그리고 국제시장이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먹고살 길을 찾기 위해 없는 공간을 개간하고, 임시 천막을 쳐가며 자연스럽게 상권을 형성했습니다. 이러한 자생적 움직임이 오늘날의 국제시장을 탄생시킨 출발점이었습니다. ‘국제시장’이라는 이름은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외국 원조 물자가 집중적으로 유통되던 ‘미제시장’이라는 별명에서 유래하였습니다. 미국을 비롯한 유엔의 원조 물자, 군수품, 중고물품 등이 이곳에서 대량으로 거래되었으며, 이 덕분에 일반 서민들도 생필품을 구입할 수 있었고, 일부는 이를 통해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따라서 국제시장은 단순한 상업 공간이 아닌, 당시 한국 사회의 계급 불균형과 국제 정세의 영향을 고스란히 담아낸 역사적 공간이기도 합니다. 이곳의 진정한 가치는 ‘서민’이라는 단어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국제시장은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서민들의 삶을 지탱해 준 생계 터전이었고, 그 안에는 삶의 지혜, 공동체의 연대, 절박한 생존 본능이 응축되어 있습니다. 시장의 골목 하나하나에는 이름 없이 살아간 수많은 사람들의 숨결이 남아 있습니다.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공간이 아니라, 전쟁이라는 시대적 재난 속에서 태어난 민중의 생존기록지라는 점에서 국제시장은 특별합니다.

도시의 생존전략이 된 시장의 공간구조와 확장성

국제시장을 직접 방문해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이곳은 단순히 가로로 뻗은 일자형 시장이 아닙니다. 세로와 가로, 경사와 통로, 옥상과 지하가 엉키고 뒤섞인 입체적 공간입니다. 이는 단순한 건축적 특성이 아니라, ‘살기 위한 공간 최적화’라는 도시 생존 전략의 결과물입니다. 초기 시장은 천막과 판잣집 형태의 임시 구조물이 주를 이루었고, 시간이 지나며 점차 철골 구조, 샌드위치 패널, 벽돌과 블록 등을 사용한 자가 건축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이러한 비공식적 증축은 각 점포 주인의 의지와 경제력, 생계 압박에 따라 무질서하게 확장되었고, 그 결과 국제시장은 하나의 도시처럼 작동하는 거대한 복합 공간이 되었습니다. 현재 국제시장은 A~E동으로 구분되며, 각 동은 의류, 잡화, 기계 부품, 주방용품, 먹거리 등으로 특화되어 있습니다. 특히 C동 먹자골목과 깡통시장은 관광객에게도 큰 인기를 끌고 있으며, 이 또한 단순한 분할이 아닌 ‘시장 생존을 위한 기능별 분화’의 산물입니다. 시장 상인들의 자생적 협력과 공간 재구성 능력은 현대 도시에서도 배워야 할 도시 회복탄력성의 사례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국제시장은 자본의 논리에 따른 철거 대신 ‘존치와 개선’이라는 도시계획적 대안을 보여줍니다. 이는 동대문시장이나 남대문시장과는 구분되는 특징으로, 부산시와 지역 사회가 협력하여 ‘살아 있는 역사 공간’으로 시장을 보존하면서도 현대화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이처럼 국제시장은 단지 남아 있는 과거가 아니라, 변화 속에서도 정체성을 유지하는 공간의 진화를 보여주는 귀중한 사례입니다.

실향민이 만든 음식문화: 한입에 담긴 고향의 기억

국제시장의 진정한 매력은 먹거리에서 완성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북 출신 실향민들이 만들었던 음식들이 세대를 넘어 전해져 내려오며, 지금의 국제시장 음식문화를 형성했습니다. 단순히 배를 채우는 음식이 아니라, 실향민들이 그리워했던 고향의 맛을 재현한 ‘기억의 음식’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대표적으로 함경도식 냉면, 평양만두, 이북식 족발, 인절미, 찹쌀도넛 등이 국제시장에서 지금도 판매되고 있으며, 이는 단순한 전통음식이 아닌 전쟁과 피란, 실향이라는 거대한 시대 흐름 속에서 태어난 이산의 요리들입니다. 특히, 함흥냉면이나 평양만두는 식당마다 고유한 레시피와 스토리를 간직하고 있으며, 몇몇 노포에서는 실향민 1세대가 자녀에게 전통을 전수하고 있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음식들이 본래 형태와는 조금씩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이는 고향 재료가 구하기 어렵거나, 남한의 식재료와 조리도구 환경에 맞추어 ‘타협의 음식’으로 진화했다는 증거입니다. 예를 들어, 이북식 냉면에 사골육수를 더하거나, 북녘식 인절미에 콩고물 대신 흑임자를 섞는 등의 방식이 대표적인 변화입니다. 이러한 음식들은 관광객들에게 단순한 먹거리 체험을 넘어, 분단과 전쟁이라는 역사적 기억을 ‘맛’으로 전달하는 감각적 기록물이 됩니다. 국제시장에서 먹는 한 끼가 평범한 식사가 아닌, 실향민의 애환과 한국 현대사의 편린을 경험하는 미각을 통한 역사 체험이 되는 것입니다. 그 어느 맛집에서도 느낄 수 없는 진정성이 바로 국제시장의 힘입니다.

국제시장은 전쟁, 이산, 생존, 기억, 그리고 도시의 진화를 모두 담고 있는 복합문화공간입니다. 그 속에는 이름 없는 사람들의 눈물과 웃음, 땀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단순히 관광지가 아닌, 시간과 공간이 살아 숨 쉬는 역사 현장으로서 국제시장을 다시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한 번쯤은 이 시장 골목을 천천히 걸으며, 전과 냉면 사이에 숨어 있는 조용한 역사와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