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은 겉으로는 조용한 항구 도시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땅을 걷다 보면 발끝에 닿는 레일, 오래된 창틀, 낡은 건물 안에는 소리 없는 저항의 역사가 흐르고 있다. 이 글에서는 경암동 철길을 중심으로, 군산 구도심에 숨겨진 항일운동과 민중 저항의 흔적들을 발굴한다. 단순한 근대건축 답사를 넘어, 살아 있는 기억의 지도를 펼치는 여행을 떠나보자.
철길 위의 침묵, 경암동에 새겨진 시간
군산 경암동 철길은 지금은 사진 명소로 유명하지만, 그 본질은 일제 수탈의 동맥이었다. 1944년 개통된 이 철길은 원래 군산항에서 옥구 평야로 이어지는 농산물과 자원을 수송하기 위한 물류라인이었다. 당시 일본 제국은 전쟁 물자 확보를 위해 전라북도 농산물을 대량 반출했고, 이 철길은 그 중심 경로였다. 그러나 이런 역사적 맥락은 대부분 관광 콘텐츠에서는 다뤄지지 않는다.
지금의 경암동 철길은 사람의 발길과 철로가 공존하는 이색 공간이다. 하지만 이 철길을 따라 걷다 보면 중간중간 '무의미하게' 보이는 공간들이 나타난다. 오래된 판잣집, 문을 닫은 공장, 창고 자리는 사실 1950~60년대 군산 노동자 거주지의 흔적이다. 1971년 군산노동자항쟁 당시 이 일대는 군산시민들의 집결지였으며, 철도와 공장이 만나는 지점이 바로 저항의 시작점이었다.
또한 이곳에는 알려지지 않은 군산 시민들의 기록이 남아 있다. 군산문화원에 보관된 한 주민의 일기에는 1960년대 중반 “공장에서 자른 철파이프를 들고 철길로 나간 날”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단순한 경치가 아니라, 철길이 곧 시민들의 투쟁 무대였던 셈이다. 이 철길은 그 자체로 도시의 아픈 역사이자 민중의 저항이 고스란히 깃든 공간이다.
거리로 나온 민중, 군산 저항의 지리학
군산은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식민지 도시였다. 일본 제국은 군산항을 중심으로 조계지를 설정하고, 외국인 거주지와 일본 경찰서, 상권, 학교, 사찰 등을 계획도시처럼 배치했다. 그 한가운데서 군산 시민들은 저항의 불씨를 키웠다. 특히 1927년 발생한 군산학생항일운동은 한국사 교과서에도 한 줄로 언급될 정도지만, 실제 그 배경과 파장은 매우 컸다.
군산중학교 학생들이 주도한 이 운동은 단순한 학생 시위가 아니었다. 일본인 교장의 조선인 차별 발언을 시작으로, 지역 노동자와 농민들이 연대하며 도시 전체가 항일 구호로 물들었다. 당시 시위 거점 중 하나였던 ‘진포시민극장’은 현재 남아 있지 않지만, 군산시 구도심 일대 일부 상가 지하에는 그 흔적이 남아 있으며, 이를 기반으로 한 비공식 기록들도 존재한다.
또한 군산은 1919년 3.1 운동 당시에도 독자적인 경로로 저항을 이어간 도시다. 군산항에서 직접 유입된 일본 순사대를 피해 시민들은 사찰과 서당에 모여 비밀 독립선언문을 제작했고, 이들은 일본영사관 앞으로 몰려가 대규모 침묵시위를 감행했다. 이 장면은 서울이나 대도시와는 전혀 다른, 바다와 골목, 시장이 결합된 도시형 저항의 초기 모델이라 볼 수 있다.
군산 시민들의 저항은 무기력한 민중의 분노가 아니라, 조직되고 의식 있는 행동이었다. 그들의 공간은 철길, 극장, 시장, 항구였다. 지금 우리가 걷는 도시의 구석구석은 바로 그 기억의 지도 위에 놓여 있다.
지워진 이름들, 기억의 장소를 다시 걷다
군산에는 우리가 ‘역사 유적지’라고 부르지 않는 곳에 오히려 더 많은 역사의 흔적이 숨어 있다. 예를 들어, 구 군산미두장(米豆場)은 일제강점기 조선 쌀을 수탈하기 위해 만들어진 일본식 거래소였다. 지금은 근대 건축물로만 소개되지만, 이곳은 해방 후 군산 노동자들의 파업장소로도 활용됐다. 당시 파업자들이 건물 안에서 점거 시위를 벌였다는 증언은 일부 시민단체 기록지에만 남아 있다.
또한 군산 근대미술관 옆 골목에는 이름 없는 계단길이 하나 있다. 이 길은 일제 시기 일본 경찰서 후문으로 이어지던 통로였으며, 수많은 민족운동가가 이 길을 지나 조사를 받았다. 현재는 일반 골목길로 보이지만, 일부 주민은 이 길을 ‘피의 골목’이라 부른다. 이런 이름 없는 공간들이야말로 군산의 진짜 기억을 품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1980년대 들어 군산의 역사 재정비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일부 장소의 과거를 '미화'하거나 '삭제'했다는 점이다. 구 일본 사찰 자리는 해방 후 공원으로 변했으며, 민족운동의 중심이었던 구 중등학교 자리에는 지금은 상업시설이 들어서 있다. 기억을 지우는 방식은 폭력이 아닌 일상 속 전환으로 이뤄졌고, 그만큼 발견은 어렵지만 의미는 깊다.
지금 우리가 군산을 여행하며 카메라를 들이대는 순간, 그 렌즈는 과거의 저항자들이 거닐던 길을 무심코 비추고 있을지도 모른다. 철길은 멈췄고, 사람은 사라졌지만, 도시의 기억은 그렇게 계속 남아 흐르고 있다.
군산은 겉으로는 조용한 항구 도시지만, 그 안에는 분노, 저항, 기록이 살아 숨 쉰다. 철길 위를 걷는다는 것은 단순한 산책이 아니라, 민중이 자신의 권리를 위해 걸었던 그 길을 다시 걷는 행위다. 여행자가 군산에서 마주하는 공간은 풍경이 아니라 '기억'이다. 이번 봄, 군산의 철길과 골목, 항구를 따라 침묵 속의 외침을 들어보자. 잊힌 이름들이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