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남부군으로 본 또 다른 한국전쟁, 지리산에서 사라진 이름들 (유격대, 민간전, 역사재조명)

by see-sky 2025. 7. 14.

 

영화 '남부군' 사진
영화 '남부군'

‘남부군’이라는 단어는 한때 금기였고,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단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 하나의 한국전쟁이자, 수많은 민간인과 산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 글에서는 ‘남부군’이란 무엇이었고, 어떤 이들이 그 대열에 있었는지, 지리산과 함께한 유격투쟁의 구조와 활동, 그리고 그 이면에 있었던 민간인들의 비극과 경계선의 모호함을 조명해 봅니다. 이는 이념을 넘어 인간의 이야기이며, 한국 현대사의 그림자와도 같은 존재를 돌아보는 중요한 발걸음입니다.

남부군은 누구였는가: 조직, 인물, 그리고 신념의 구조

‘남부군’은  무장집단이 아니라, 조직적 체계와 정치 이념을 바탕으로 움직였던 유격대였습니다. 1948년 여순사건 이후 전라남도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좌익계 무장세력은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본격적으로 확대되었고, 남부지역 유격활동의 핵심 조직으로 ‘남부군’이라는 명칭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들은 조선노동당 산하 유격부대로, 전남·경남·북부 경상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지리산을 주요 근거지로 삼았습니다. 남부군은 정치지도자와 군사지휘관, 그리고 연락책, 교육대원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단순한 전투 조직을 넘어 ‘해방구 건설’을 목적으로 한 이념투쟁 조직으로 기능했습니다. 무장투쟁뿐만 아니라 선전·선동, 인민재판, 세금징수 등 체계적인 활동을 펼쳤고, 그 중심에는 이현상 같은 전설적인 유격 지휘관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한편으로는 좌익계열 민간인의 보호막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농민들에게 공포와 징발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빨치산'이라는 이름 뒤에는 '민족해방'이라는 이념과 '살기 위한 항전'이 교차하고 있었고, 이는 단순히 어느 쪽이 옳다기보다는, 전쟁이라는 극단 속에서 각자의 선택이 만들어낸 결과였습니다. 남부군의 활동은 ‘남한 내 전쟁’이라는 점에서 매우 독특합니다. 국군과 유엔군이 북쪽으로 진격하던 시기에도 지리산과 남부 산악지대에서는 게릴라전, 유격전이 몇 년간 지속되었고, 이는 한국전쟁의 종전 선언과는 별개로 끝나지 않은 전쟁의 실상을 보여줍니다.

지리산의 유령들: 남부군 유격대의 전술과 산속의 실전 기록

남부군의 활동 무대는 단연 지리산입니다. 이곳은 가파른 산세, 복잡한 계곡, 은신처와 탈출로가 풍부한 지형 덕분에 유격전의 최적지로 평가받았습니다. 국군이 확보하지 못한 산악 지대는 남부군에게 ‘해방구’로 불리며, 그 안에서 자체적인 교육, 보급, 체포·심문, 징발, 처형 등의 독자적 체제가 운영되었습니다. 남부군의 유격전술은 유동적이고도 은밀했습니다. 정규군과 달리 이들은 기습공격 → 은신 → 이동 → 재공격의 패턴을 반복하며 국군을 교란시켰고, 일부는 소규모 전투에서도 고지 점령에 성공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비록 무기나 인력 면에서 열세였지만, 지형지식을 활용한 민첩한 전술과 지역 주민의 일부 지원 덕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지리산은 ‘성역’이 아닌 ‘덫’이 되기도 했습니다. 국군은 ‘지리산 토벌사령부’를 창설하고, 헬기정찰, 마을 고립, 협조자 색출 등을 통해 남부군의 공급망과 은신처를 차단했습니다. 1953년 정전협정 이후에도 이 토벌은 1957년까지 계속되었으며, 이는 남북이 휴전했지만 내부의 전쟁은 멈추지 않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이름 없는 유격대원들과 가족들, 심지어 아무 관련 없는 민간인들까지 ‘빨갱이’로 몰려 희생당했습니다. 이들은 기록되지 않았고, 판결도 없었으며, 단지 ‘산에 있었다’는 이유로 삶을 빼앗겼습니다. 지리산에는 지금도 이름 모를 무덤과 증언들이 남아 있고, 이는 아직 끝나지 않은 한국전쟁의 진짜 얼굴을 보여주는 역사적 유물입니다.

남부군과 민간인의 경계, 전쟁 속의 또 다른 비극

한국전쟁은 정규군 간의 전투만으로 구성되지 않았습니다. 마을과 마을 사이, 산과 들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 바로 그것이 남부군과 민간인이 뒤엉킨 ‘비공식적 전쟁의 현장’이었습니다. 특히 남부군은 정기군대가 아닌 유격대의 특성상 민간인과 구분이 어려웠고, 이는 수많은 무차별적 피해로 이어졌습니다. 남부군은 활동 지역에서 식량과 정보, 인력을 조달해야 했고, 이를 위해 농민들과의 접촉이 불가피했습니다. 처음에는 협력 관계였던 이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강제 징발, 협박, 내부 숙청 등의 피해를 입기 시작했습니다. 반대로 국군 역시 마을 주민 중 남부군과 접촉한 사람들을 처벌하거나 색출했으며, 이 과정에서 죄 없는 이들이 ‘용공 혐의자’로 몰려 희생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1950~1955년 사이 지리산 일대에서는 명확한 증거 없는 민간인 학살 사건이 다수 보고되었고, 이는 오늘날까지도 진실화해위원회, 유족회 등에서 조사를 이어가고 있는 역사적 논쟁점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남부군의 존재는 단순한 무장단체의 문제가 아니라,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인간과 인간 사이에 생긴 비극의 경계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입니다. 한편, 남부군과 함께한 여성들의 서사는 더욱 복합적입니다. 이들은 전투원, 간호병, 연락병으로 활약했지만, 전장에서의 처우는 열악했고, 때로는 이념적 명분 뒤에 감춰진 성적 피해의 피해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이야기는 드러나지 않았고, 한국전쟁을 다룬 공식적 서사에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존재는 ‘전쟁 속 여성’이 겪는 다층적 고통의 한 단면이자, 우리가 외면해 온 보이지 않는 역사입니다.

남부군은 평범한 ‘빨치산’이나 ‘반군’이 아닙니다. 그것은 한국전쟁이라는 거대한 틀 안에서 나타난 지역, 민중, 이념, 인간의 복합적 충돌이 낳은 결과이며,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이 글을 통해 남부군이라는 단어에 담긴 무게와, 그 속에서 살아간 사람들의 존재를 조금이나마 재조명해 보셨길 바랍니다. 지리산 자락 어딘가, 우리가 잊은 이름들이 아직도 바람 속을 떠돌고 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에 잠시 귀를 기울여 보는 것, 그것이 진짜 역사 여행의 시작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