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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쟁으로 알수 있는 역사 기행(조선 정치의 세계, 붕당)

by see-sky 2025. 3. 18.

조선의 서원 사진
ㅈ선 정치의 세계조선의 서원

조선은 피보다 말이 먼저였던 나라였습니다. 권력을 쟁취하는 도구가 칼이 아니라 붓이었고, 정적을 쓰러뜨리는 무기는 말과 글, 그리고 기록이었습니다. 당쟁은 단순한 권력 투쟁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조선이라는 유교국가에서 ‘무엇이 옳은가’에 대한 해석 싸움이자, 한 줄의 사초, 한 문장의 상소 속에 목숨을 걸었던 사림들의 철학적 전쟁이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조선의 정치가 어떻게 기록과 말을 통해 작동했는지, 그리고 그 흔적들이 오늘날 어디에 남아 있는지를 따라가며 조선의 또 다른 풍경을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붓끝으로 세상을 가르다 – 조선 정치의 언어, 상소와 사초의 세계

조선에서 정치를 움직인 것은 무력이나 재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말’과 ‘기록’이었습니다.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은 삼사(三司)라 불리며 왕의 언행을 감시하고, 신료들의 잘못을 고발하는 기능을 수행하였습니다. 그들이 다룬 도구는 무기가 아니라 오직 문서였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무기가 바로 ‘상소’였습니다. 상소는 신하가 군왕에게 올리는 글로, 때로는 왕의 정적을 고발하고, 때로는 국정의 오류를 비판하며, 심지어는 임금을 꾸짖는 ‘격쟁’의 형식으로까지 발전하였습니다.

상소는 일반적인 청원이 아니었습니다. 조선의 상소는 ‘문장력’과 ‘논리성’이라는 두 가지 기준으로 평가받았으며, 특히 당쟁이 격화되던 17~18세기에는 상소가 곧 정치 성명서였고, 학문적 선언문이기도 하였습니다. 유명한 예로는 ‘송시열의 신유상소’와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그는 남인의 처벌을 요구하며 "도학은 사라지고 간신은 권력을 얻었다"라고 직격탄을 날렸습니다. 그 문장은 단순한 비판이 아니라, 사문(斯文)의 존립 여부를 가르는 철학적 선전포고였습니다.

사초는 더욱 위험한 기록이었습니다. 사초는 사관이 군왕과 신료들의 언행을 ‘비공식적으로’ 적어 남긴 기록으로, 왕도 열람할 수 없었습니다. 왕의 실언이나 감정적인 행동까지도 빠짐없이 기록되었기에, 사초의 작성은 때때로 목숨을 건 행위가 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을 남긴 사관 중에는 사초 내용으로 인해 문책, 유배, 혹은 죽음을 맞이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오늘날 서울 성균관 뒤편에는 ‘사초각(史草閣)’이라는 건물터가 남아 있으며, 이곳은 사관들이 사초를 정리하던 공간으로 추정됩니다. 이처럼 조선의 정치는 기록되지 않은 말보다, **기록된 글**이 역사의 흐름을 바꾸었습니다. 당쟁은 결국, 누가 더 설득력 있게 옳음을 주장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장과 철학의 전쟁이었습니다.

붕당은 사상의 실험실이었다 – 당쟁이 만든 말과 철학의 갈래들

조선의 당쟁은 ‘정파 싸움’으로만 이해되곤 하지만, 사실 그것은 정치 철학과 윤리관의 분화 과정이었습니다. 서인과 남인, 노론과 소론은 단지 혈연과 권력 싸움이 아니라, 세계관과 국가관, 인간관에 대한 해석 차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들의 싸움은 말과 글, 곧 '주석(註釋)'이라는 형태로 드러났습니다.

예를 들어, 남인의 대표 학자 윤휴는 <논어>와 <맹자>의 구절을 새롭게 해석하며 ‘실천적 유교’를 주장하였습니다. 반면, 서인의 송시열은 기존 성리학 주석을 철저히 따르며 절대적인 도덕 기준과 충성윤리를 강조했습니다. 서로 다른 주석 하나가, 곧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는 이름으로 낙인찍히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결국 정치적 격돌로 이어졌고, 단순한 말싸움이 아니라 정치적 숙청과 유배, 사약이라는 비극으로 번지기도 했습니다.

함양의 남계서원, 안동의 병산서원, 공주의 유구 향교 등은 당파에 따라 제향 하는 인물과 배향 순서가 달랐으며, 동일한 성현이라 해도 해석 방식에 따라 서원 간의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서원은 단지 교육기관이 아니라 사상적 붕당의 거점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방문하는 서원과 향교, 그리고 묘역과 제향 지는 단지 고풍스러운 건축물이 아니라, 조선의 당쟁이 ‘학문을 빙자한 권력 투쟁’이자, 동시에 학문으로 정당화된 이념 충돌의 장이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곳에 남은 현판, 주련, 제향기록은 모두 그들이 쓴 또 하나의 '정치문서'였던 셈입니다.

말은 남고 사람은 사라지다 – 조선의 정치가 지금에게 남긴 질문

조선의 당쟁은 많은 폐해를 낳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수많은 인재가 유배되었고, 문묘에 오르지 못하였으며, 심지어 사약을 받아 생을 마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그 당쟁 속에서 '토론하는 정치', '철학으로 싸우는 정치'라는 전통 또한 함께 보아야 합니다.

오늘날 정치가 여전히 감정과 대결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가운데, 조선 시대의 사관(史官)은 ‘무엇이 옳은가’를 묻는 데 있어 자신조차도 기록의 대상이 되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의견조차 사초에 포함되는 시대, 그들은 ‘말의 윤리’를 누구보다 진지하게 고민하였습니다. 그 결과로 남겨진 수천 권의 실록, 수만 편의 상소와 주석, 그리고 사문들은 지금 우리가 조선을 읽는 유일한 창이 되었습니다.

조선은 무너졌지만, 조선의 ‘기록하는 정치’, ‘설득하는 언어’, ‘말로 싸운 철학’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우리가 오늘날 정치와 사회를 바라볼 때, 다시금 조선의 당쟁을 참고한다면, 그들의 싸움은 단순한 권력욕이 아니라 무엇이 올바른가를 둘러싼 시대 전체의 고민이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여행자 여러분께서 성균관을 찾으시거나, 지방의 한 서원을 둘러보시게 된다면, 그곳의 벽에 걸린 주련 한 구절, 제향 대상자 한 명의 이름이 단지 과거의 누군가가 아니라, ‘무엇이 옳은가’를 말했던 조선의 한 목소리임을 기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