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은 단지 등산 코스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이 산은 오래전부터 수행자와 사유자들이 걷던 ‘침묵의 공간’이자, 현대인에게는 말없이 나를 마주하는 ‘통찰의 공간’이 되어왔다. 이 글에서는 설악산의 사찰, 고승들의 수행길, 그리고 걷는 행위 자체가 주는 묵언의 철학을 따라, 사람들이 쉽게 이야기하지 않는 설악산의 또 다른 얼굴을 탐구한다.
걷는 수행, 설악산이 품은 묵언의 길
설악산을 걷는 많은 이들은 말이 없다. 숨이 차서 그런 걸 수도 있지만, 사실 설악산의 깊은 골짜기와 오랜 암자들을 통과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말을 아끼게 된다. 이 산은 단순한 자연경관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묵언수행과 내면의 통찰을 위한 공간으로 인식되어 왔다. 대표적인 공간이 바로 백담사에서 오세암으로 이어지는 고요한 산책로다.
이 길은 조계종에서조차 ‘가장 조용한 성찰의 길’로 불린다. 초입의 백담사부터 중간지점인 영시암, 마지막의 오세암까지, 길 전체가 소음을 배제하고 자연의 소리와 함께 걷는 구성으로 설계되어 있다. 이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이 침묵에 젖어 있다는 걸 인식하게 된다. 실제로 신흥사 소속 승려들은 이 길을 ‘산을 건너는 기도’라 부르며, 새벽이나 한밤중에 수행 도량으로 사용한다.
이 구간을 걷는 동안 마주치는 안내판에는 어떤 ‘이야기’도 없다. 대신 묵언수행을 권하는 조용한 문구와 조그만 석탑, 돌탑, 나무 의자들이 존재할 뿐이다. 이는 말보다 걷는 행위 자체가 중심이 되는 공간 철학이다. 설악산은 우리에게 “생각하지 말고 느껴라”가 아닌, “말하지 말고 사유하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산이다. 그 침묵은 절제가 아닌 자각이다. 내가 어떤 언어를 버릴 수 있을 때, 비로소 스스로를 진정으로 인식하게 된다.
말의 공허를 넘어, 설악의 불심에 머무르다
설악산의 사찰은 관광지가 아니다. 신흥사, 백담사, 봉정암은 ‘불교적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수도승과 보살행자의 흔적이 배어 있는 살아 있는 도량이다. 이곳의 공기는 산소가 아닌 기도가 차오른 공간이며, 산길은 등산로가 아닌 오랜 발원과 참회의 흔적이다. 특히 봉정암은 조계종 승려들에게조차 ‘말을 버려야만 도달할 수 있는 곳’으로 여겨진다.
봉정암까지 오르는 길은 단순히 가파른 경사가 아니라, 실제로 고승들이 입산 후 첫 묵언 수행을 시작하는 장소였다. 현대의 트레킹객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종종 소음을 내며 통과하지만, 조용히 귀 기울이면 곳곳에 배어 있는 무언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암자 근처에는 지금도 일주문도, 안내 표지판도 거의 없다. 일부러 ‘설명’을 제거한 공간이다. 그 자체가 수행의 시작인 셈이다.
백담사의 고승 만해 한용운도 이곳을 종종 찾았다. 《님의 침묵》이라는 시집은 단지 애틋한 사랑의 시가 아니라, 말로 다하지 못하는 민족의 통증, 스스로의 내면과의 대화를 담은 불교적 침묵의 결정체였다. 그가 백담사를 떠나 봉정암 아래를 거닐며 했다는 말이 있다. “말은 허기고, 침묵은 충만이다.” 이 산의 스님들은 수천 년 전부터 같은 방식으로, 말없이 걷고 기도해 왔다. 그 길 위를 우리가 다시 걷는다면, 단지 트레킹을 넘어 ‘존재의 무게’를 느끼게 된다.
등산 아닌 통찰, 설악에서 만나는 나
대부분의 여행은 말을 쏟아내는 방식으로 기록된다. 인스타그램의 캡션, 유튜브 브이로그, 리뷰 블로그 모두 ‘말하기’에 집중한다. 하지만 설악산은 다른 방식의 여행을 요구한다. 그것은 ‘기록하지 않는 기록’, ‘말하지 않는 통찰’이다. 설악산은 수많은 사색가와 문인들의 영감을 자극한 공간이다. 이덕무, 정약용, 박지원, 한용운까지 이 산을 거쳐 간 이들은 모두 말이 아닌 고요함 속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특히 오세암 근처에는 흔히 알려지지 않은 ‘무명 수행자 묘역’이 있다. 이름 없이 숨을 거둔 수도자들이 묵 silently 죽음을 맞이한 곳으로, 안내판 하나 없는 그 땅엔 소박한 돌무덤만이 줄지어 있다. 이곳에 서면, 세상의 어떤 말도 덧없어지고, 오히려 침묵이 가장 큰 언어로 다가온다.
설악산은 등산을 위한 산이 아니라, 말을 잊고 나를 찾는 장소다. 이곳은 자연이 크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작아질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에 위대하다. 정상에 오르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그저 한 걸음 한 걸음, 침묵으로 내면의 어둠을 마주하고, 바위와 숲, 계곡에서 내 마음의 흔들림을 보는 것이 설악이 주는 선물이다.
설악산의 길은 오래 남지 않는다. 바람이 흔적을 지우고, 계곡이 소리를 삼킨다. 그러나 그 순간 느껴지는 비어 있음의 충만함, 그것이 바로 설악이 오늘날에도 수많은 이들에게 내면의 길을 제시하는 이유다. 등산이 아닌 통찰, 침묵이 아닌 대화, 설악은 그 모든 반대어를 뒤집는 산이다.
설악산은 말 없는 산이다. 그러나 그 침묵 속엔 불심이, 수행이, 그리고 통찰이 있다. 단지 등산객의 무릎을 시험하는 산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 말의 무게를 내려놓게 하는 공간이다. 이번 여행은 말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말을 비우는 여정이 되어야 한다. 설악에서 걸으며, 묵언을 배우고, 나를 듣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