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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기억하고, 파도가 삼킨 이름들 – 묵호항에서 건져 올린 시간

by see-sky 2025. 5. 16.

묵호항의 등대 사진
묵호항의 등대

강원도 동해시 묵호항은 조용한 항구입니다. 관광객들의 발길이 머무는 묵호등대, 논골담길, 어시장만 보자면 그저 평화로운 어촌 마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곳은 한때 바다가 육지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기억했던 곳이며, 삶과 이념, 귀향과 이별이 교차했던 ‘출발점이자 끝의 장소’였습니다. 묵호항은 단지 물고기를 실어 나르던 항구가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전쟁으로 남겨진 사람들, 실향민, 그리고 해안선을 따라 사라진 이름들이 모여 머물렀던 ‘기억의 바다’였습니다. 이 글에서는 사람들이 쉽게 말하지 않는, 하지만 묵호항이 조용히 간직해 온 시간과 흔적들을 따라가 보고자 합니다.

지도에도 없는 길, 묵호항이 기억하는 실향의 바다

묵호항이 항구로서 본격적인 기능을 하게 된 것은 1940년대 말, 그리고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950년대 초반이었습니다. 전쟁을 피해 남하한 실향민들이 가장 먼저 닿은 곳 중 하나가 바로 이 동해안의 작은 항구, 묵호항이었습니다. 부산, 인천과 달리 대형 무역항으로 기록되진 않았지만, 묵호는 수많은 무등록 선박과 피란선을 맞이했던 ‘출발지이자 정착지’였습니다.

당시 묵호항 일대에는 각지에서 피란 온 실향민들이 무리를 이루며 살았습니다. 특히 함경도, 평안북도, 강원도 이북 출신의 어민과 가족들이 임시로 천막을 치고, 다시 배를 타거나 어촌에 머무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대부분은 공식 통계에도 남지 않았고, 이름조차 기록되지 않은 채 항구의 기억 속으로 묻히고 말았습니다.

논골담길을 올라가면, 지금은 관광지로 꾸며진 집 벽 사이사이에서 그 시절을 기억하는 어르신들의 낡은 흑백사진이 보이곤 합니다. 하지만 누구도 정확히 말해 주지 않습니다. 누가 왔다가 어디로 갔는지, 누가 돌아오지 못했는지. 파도는 모든 것을 가져가고, 묵호는 말 대신 그것을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습니다.

묵호항은 당시에는 출입이 까다롭지 않았고, 서류 없는 배들도 쉽게 드나들 수 있었습니다. 그런 구조는 해상 유입자들에게는 유리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의 존재를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게 만든 배경이 되기도 했습니다. 묵호는 그렇게, 많은 사람을 품었지만 아무 이름도 붙이지 않은 채 기억의 바다로 남아 있었습니다.

파도가 삼킨 이야기, 사라진 이름들에 귀 기울이다

묵호항에는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특히 전쟁 이후 이곳을 떠나간 이들, 돌아오지 못한 이들, 그리고 그 틈에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동해항이 확장되기 이전까지, 묵호는 동해안 북부 해안선의 주요 보급로이자 군사·민간 이송 항로였습니다. 그러나 민간인의 기록은 쉽게 묻혔고, ‘관리되지 않은 기억’은 파도처럼 스러져 갔습니다.

1970년대, 동해항이 개발되면서 묵호항은 서서히 뒷전으로 밀려났습니다. 그 무렵부터 묵호는 ‘소외된 항구’, ‘노동자의 마을’로 이미지가 전환되었습니다. 어민들의 소득은 줄었고, 항구에는 묵은 배들과 정박만 된 채 움직이지 않는 어선들이 늘어났습니다. 사람들은 떠났고, 기억도 서서히 바닷물 아래로 가라앉았습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동해시와 지역 주민들은 묵호의 시간을 다시 꺼내기 위한 노력을 시작하였습니다. 묵호 논골담길에는 실향민 정착 이야기, 전통 어업 방식, 실종 어부들에 대한 추모 벽화가 조용히 그려졌습니다. 작은 공간이지만 그곳에 남은 그림과 문구는 그 시절 파도에 사라졌던 이름들에 대한 작은 위로가 되어 주고 있습니다.

특히, 항구 뒤편으로 이어지는 바닷길 중 ‘묵호 선착장 옛길’은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경로입니다. 예전 실향민 어민들이 주로 이용하던 길로, 지금은 낡은 철제 계단과 마모된 콘크리트 경사로가 남아 있습니다. 그 길 위에 서서 바다를 보면, 지금도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듯한 고요한 느낌이 여행자의 마음을 붙잡습니다.

조용한 항구가 들려주는 말 없는 기억, 묵호의 오늘

지금의 묵호는 정돈되고, 밝고, 감성적인 여행지로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등대 옆으로는 작은 북카페가 생기고, 논골담길은 인스타그램 명소로 불리고 있으며, 묵호시장에는 현대식 해산물 마켓이 들어섰습니다.

그러나 이 변화는 과거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억을 더 조용하게 만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묵호는 언제나 조용한 도시였습니다. 말이 많지 않고, 역사를 자랑하지 않으며, 누가 언제 와서 무엇을 남겼는지를 대신 파도에게 맡기는 방식으로 시간을 지나왔습니다.

그래서 여행자 여러분께서는 묵호를 단지 관광지로만 보시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진을 찍기 전에 한 번쯤 멈춰 서서, 이곳에 어떤 발자국이 있었는지를 상상해 보신다면, 묵호는 훨씬 더 깊고, 조용한 여행지로 다가올 것입니다.

묵호항은 조그마한 항구입니다. 하지만 그 바다 아래에는 기록되지 않은 이름들이 남아 있고, 그 파도 위에는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의 소식이 맴돌고 있습니다. 묵호는 기억의 바다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기억을 함께 걸어주는 순간, 묵호는 더 이상 조용한 항구가 아니라 ‘다시 살아나는 이야기의 공간’이 되어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