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변산반도의 산사, 성곽, 바닷바람

by see-sky 2025. 4. 6.

변산반도 사진
변산반도

변산반도는 풍경으로만 기억되기엔 너무 조용하고, 역사로만 기억되기엔 너무 아름답습니다. 이곳은 고려의 궁녀가 은둔하고, 조선의 유생이 글을 버리며 칼을 들었던 장소이며, 바다와 산을 끼고 나라를 지킨 사람들의 ‘방어의 기억’이 고요히 깃든 공간입니다. 변산은 전쟁을 숨기고, 사찰에 전략을 숨기고, 바닷길에 국경선을 남겼습니다. 이 글은 변산의 뒷면을 걷는 역사기행입니다.

산사는 피난처가 아니었다 – 내소사와 은둔의 정치학

전라북도 부안, 변산반도 중심 깊숙이 위치한 내소사는 조용하고 장엄한 산사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곳을 '힐링 여행지', '고즈넉한 사찰 여행'으로 기억하시지만, 사실 이곳은 고려 말부터 조선 전기까지 권력자들의 은둔 공간이자 군사적 피난처 역할을 했던 장소였습니다.

내소사는 백제 무왕대의 창건설과 함께, 실제 역사적 맥락에서는 고려 중기 이후에 본격적인 불교 사찰로 자리 잡았습니다. 하지만 특이한 점은, 이곳의 지리적 배치와 외부로부터의 단절 구조입니다. 변산의 산줄기와 해안선 사이에 파묻혀 있는 내소사는, 은둔과 방어, 침묵과 감시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했던 공간으로 추정됩니다.

특히 조선 시대에는 유배지나 정쟁에서 밀려난 문인과 관료들이 내소사 인근에 은신하거나 머무는 일이 많았으며, 그들 중 일부는 아예 환속하거나, 내소사 뒷산에서 세속과 단절된 삶을 택한 이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사례는 내소사에 보존된 목판 인쇄물, 사적기, 그리고 비공식 구전 사료를 통해 일부 확인됩니다.

이곳이 단지 불경만을 외운 공간이 아니라, 권력의 후퇴선, 나라의 경계지대, 그리고 문화와 정권의 전환기에 긴 호흡을 담은 장소였다는 점은, 내소사 대웅전 앞마당에 앉아 오래 머물다 보면 자연스럽게 느껴지곤 합니다.

한편, 내소사와 함께 연계된 변산사와 쌍계사, 봉래구암터 등은 산사이면서 동시에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기능한 임시 피난처이자 정보 교류 거점이었다는 점에서 이 일대가 단순한 종교 공간이 아니라 국가 전환기의 전술적·정치적 공간이었음을 시사합니다.

바닷가에 성을 쌓은 이유 – 곰소, 방조제, 그리고 잊힌 해안 국방

변산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 지형이기에, 예로부터 외침의 통로이자 방어의 요충지로 여겨졌습니다. 특히 조선 중기 이후, 이 지역은 왜구의 상륙 경로로 자주 언급되며, 그에 따라 곰소와 줄포, 하서면 일대에 비공식적 성벽과 방책이 만들어졌습니다.

지금은 방조제와 갯벌 체험장으로 알려진 곰소염전 일대는 사실 과거 왜구 방어선의 일부였습니다. 부안 군 지 기록에 따르면, 이곳은 조선 전기 ‘간첩을 잡는 해안 목책’이 설치되었던 곳으로, 야간경계 초소가 있었으며 어민들 사이에 ‘말 없는 방파제’라 불렸습니다. 이 방책은 돌이나 흙으로 쌓은 것이 아니라 갯벌에 뽕나무와 솔가지를 엮어 만든 생태적 방어시설이었다는 점에서 전통 해양 국방의 독특한 사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변산 해안가를 따라 걷다 보면, 중간중간 돌무더기와 해풍에 깎인 성토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그중 일부는 일제강점기 일본군의 해안초소, 또 일부는 조선 수군의 ‘해상 망루’ 터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가장 흥미로운 유적은 하서면의 ‘외적망대’ 터인데요, 현재는 작은 표지석 하나만 남아 있지만, 실제 조선 후기에는 이 일대가 중앙 정부의 파견 장수가 관찰사에게 직접 상황을 보고하던 전략적 해안 감시선이었습니다.

즉, 변산은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변두리처럼 보이지만, 국가적으로는 항상 중심부가 두려워했던 경계선이었습니다. 그 두려움이 성곽과 초소, 방조제와 성담으로 남은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흔적들은 대부분 정식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지 않으며, 현지 어민들이 구전으로 전해줄 뿐입니다. 그래서 지금 변산을 걷는다는 건, 성곽이 사라진 성지를 걷는 일, 이름 없이 나라를 지킨 이들의 시선을 뒤쫓는 행위일지도 모릅니다.

바닷바람과 젓갈, 민초의 밥상에 깃든 역사

역사 기행을 마치고 나면, 향토 음식 한 끼는 몸과 마음을 함께 풀어주는 휴식이 됩니다. 변산반도에서 반드시 맛보셔야 할 음식은 곰소 젓갈, 백합죽, 그리고 변산 뻘낙지입니다.

먼저 곰소항의 젓갈시장은 단순한 재래시장이 아닙니다. 조선시대 내내 이곳은 국가의 소금 생산지이자 젓갈 진상품 집산지였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곰소항에서 만들어진 젓갈은 전라도와 충청도 일부의 관아로 납품되었고, 특히 멸치젓과 황석어젓은 한양으로 올라가는 상납품으로 인정받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젓갈들은 단순히 음식 이상의 의미를 가졌습니다. 염장 기술은 전쟁과 식량 보존, 유배자 생존의 기술이었고, 실제로 내소사 주변에서 독립운동가들이 은둔하던 시절, 곰소 어부들이 몰래 젓갈과 식량을 전달했다는 구술 자료도 일부 전해집니다.

또한 부안 백합죽은 변산반도 서쪽 해안의 갯벌에서 채취한 백합을 쌀과 들기름으로 볶아 만든 음식으로, 속을 편안히 해주면서도 단백질이 풍부해 해방 전후 피난민들 사이에서 생계 식사로 자주 등장했던 음식입니다.

마지막으로 뻘낙지 초무침은 해안 어민들이 갯벌 작업 후 먹던 원기 회복식입니다. 생선이 귀하던 시절, 뻘에서 낙지를 잡아 고추장, 간장, 마늘, 마른 김과 함께 비벼 먹던 이 한 그릇은 지금도 곰소시장 골목 안 허름한 가게들에서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변산의 음식은 그저 ‘맛있는 지역 음식’이 아니라, 국경을 지킨 사람들의 땀과 추억이 남은 식탁 위의 역사서입니다. 그 한 그릇에는 은둔과 생존, 지킴과 기다림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변산반도는 지금 조용합니다. 하늘엔 구름이 흐르고, 바다는 소리를 아낍니다. 하지만 그 침묵 아래에는 수많은 전쟁의 그림자, 지켜내려 했던 땅의 경계, 그리고 이름 없는 사람들의 기록이 흐릅니다.

변산의 산사와 해안은 ‘어디에도 쓰이지 않은 역사’가 아닌, ‘지워지지 않아 남은 기록’입니다.

이곳을 걷는다는 건 전쟁 없는 시대의 평화 속에서, 전쟁을 준비했던 사람들의 마음을 만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조용한 기억은, 지금도 우리 곁에 바람처럼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