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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섬마을의 금기와 기억이 얽힌 바다의 민속 역사 (구술문화, 제의)

by see-sky 2025. 3. 14.

섬 사진
남해의 섬

섬은  풍경으로 기억되지만, 그 안에는 지도로도 찾을 수 없는 '사람의 역사'가 숨어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공식 기록에는 남지 않은 섬마을의 구술 전승, 전통 제의, 기도와 금기의 문화 속에서 바다 위의 민속 역사를 찾아 나설 것입니다. 섬은 말이 없지만, 오래된 기억은 바람을 타고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말로만 남은 역사, 섬에서 전해진 입의 기록

역사라는 말은 흔히 문헌과 연대기로 정의되지만, 섬에서는 그 정의가 통하지 않습니다. 섬마을의 많은 사건과 인물, 전설은 종이에 적히기보다는 입으로 전해진 기억입니다. 이를 ‘구술사’라 부르며, 특히 외진 섬일수록 그 가치가 높습니다. 예를 들어, 전남 신안의 장산도에는 공식적인 독립운동사나 전투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노인들의 증언을 통해 1920년대 후반 청년 몇 명이 목포에서 독립운동 선전물을 실은 배를 타고 몰래 상륙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이는 당시 자료에서는 찾을 수 없지만, 마을 어귀의 바위 밑에 몰래 감춰뒀다는 그 전단을 기억하는 할머니의 목소리에서 살아납니다.

또 다른 예는 경북 울릉도의 나리분지에 있다. 이 고립된 지형 안에서는, 일제강점기 때 마을 전체가 징용을 피하기 위해 마을 출입을 제한하고, 허가받지 않은 외부인을 보면 “잡귀가 들어온다”며 가짜 굿판을 벌였다는 전승이 있습니다. 이러한 구술기록은 그 자체로 지역이 자구책으로 문화적 금기를 만들어낸 방식이며, 문서보다 생생한 ‘살아 있는 역사’입니다.

섬의 역사란, 말해지지 않으면 사라지는 기록들입니다. 그리고 그 기록은 풍화되지 않는 바위나 오래된 나무보다 더 강하게, 노인의 입과 손짓 안에 남아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기록되지 않은 시간’이야말로, 섬이 품은 진짜 역사일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인식해야 합니다.

기도는 제의가 되고, 제의는 공동체가 된다

섬에서 가장 강력한 문화는 ‘제의’입니다. 기후와 바다, 생존과 죽음이 일상인 공간에서 사람들은 자연을 달래고 공존하기 위한 의례적 언어를 만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제의는 종교와 무속, 노동과 연대가 겹쳐진 복합체로 발전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진도 조도면의 ‘해상 당제’입니다. 매년 음력 2월이 되면 마을 주민들은 특정 날짜에 무녀와 함께 배를 타고 나가, 바다 한복판에서 제단을 차리고 풍어와 안녕을 빕니다. 이 제의는 정식 행정 기록에도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주민들은 “그날 그 의식을 건너뛰면 배가 뒤집힌다”는 말을 진심으로 믿고 있습니다. 현대화된 항로와 어업장비가 들어온 지금도 이 전통은 매년 같은 장소, 같은 방식으로 치러집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제의에는 ‘참가 자격’이 존재한다는 점 입다. 예를 들어 마을 외부 남성이 참여하면 바다가 뒤집힌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출산 직후 여성은 제단에 오를 수 없다는 등의 금기도 있습니다. 이런 전통은 현대인의 눈에는 비합리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섬이라는 밀폐된 공간에서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심리적 장치이자 권력 구조로 기능해 왔습니다.

또한 제주는 '굿'과 '노동'이 같은 의미로 통합니다. 해녀 공동체에서 행해지는 물질굿은 풍어를 비는 동시에, 공동체의 규율을 선언하고 새로운 해녀를 받아들이는 ‘의식’이었습니다. 이처럼 섬에서는 기도가 제의가 되고, 제의가 곧 공동체의 헌법이 되는 순환이 자연스럽게 작동합니다.

금기의 풍경, 섬이 지켜온 말 못 할 규칙들

섬은 닫힌 사회이기에, 말로는 다 하지 못하는 규칙이 존재합니다. 이 규칙은 문서나 간판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체득되고, 세대를 건너 계승되어 왔습니다.

전라남도 고흥의 외딴섬 연홍도에는 ‘절벽 방향으로 집을 지으면 집안이 망한다’는 속설이 있습니다. 마을의 모든 집은 해안선을 향해 일정한 각도로만 배치되어 있으며, 실제로 과거에 절벽을 향해 집을 지은 가족은 자손 없이 떠났다는 구술이 전해집니다. 이처럼 섬의 건축 구조, 공간 배치까지도 금기의 흔적을 따릅니다.

또한 통영의 섬마을 사량도에서는 ‘아이를 돌보다가 파도를 거슬러 말하면 안 된다’는 금기가 있습니다. 이는 과거 아이가 바다에 빠진 뒤 어미가 크게 부르자 그 바람이 바다신을 자극해 더 큰 파도를 불렀다는 이야기에 기초한 것으로, 현재도 노인들은 젊은 엄마들에게 “바다 보고 말하지 말아라”라고 조용히 당부합니다.

금기는 두려움에서 만들어집니다. 하지만 섬의 금기는 두려움을 넘은 ‘공존의 방식’으로 진화되어 왔습니다. 섬에서 금기를 어긴다는 것은 단순히 규칙을 깨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쌓아온 경험과 자연과의 합의를 무시하는 행위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섬에서 금기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모두가 알고, 모두가 존중합니다.

섬의 금기는 종종 설화로, 민담으로, 제의의 조각으로 전해집니다. 그것은 말보다 강하고, 법보다 오래 살아남는 지혜입니다. 우리는 이런 금기들을 통해 섬이 어떻게 자신의 삶을 지켜왔는지, 바다와 어떻게 협상해 왔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섬은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말 없는 공간에는 수많은 기억과 기도가, 입으로 전해지는 역사가 존재합니다. 지도에 없는 역사, 문서로는 남지 않은 금기와 제의 속에 섬의 삶이 있습니다. 이제는 그 무형의 기억을 걷고, 듣고, 기록하는 여행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