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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이라는 조용한 역사기록 (민중, 종교, 합천의 침묵)

by see-sky 2025. 4. 1.

합천 해인사 사진
합천해인사

경상남도 합천은 해인사와 황매산으로 유명하지만, 그 너머에는 오랫동안 기록되지 않은 민중의 삶, 종교적 사유, 전쟁의 상처가 고요히 누적된 역사적 공간이 존재합니다. 이 글에서는 관광지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합천의 뒷면을 따라, 말없는 기록이 살아 숨 쉬는 마을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말 없는 백성의 시간, 합천 민중의 삶터를 걷다

합천은 겉으로 보기에는 조용한 시골 마을이지만, 이곳에는 오랜 세월 동안 ‘민중’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사람들의 생활사와 사상이 깊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행정 중심지였던 적도 없고, 대규모 산업화가 진행된 적도 없었기에, 상대적으로 기록되지 않은 역사, 즉 민중의 일상과 사유가 원형 그대로 보존된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지역이 초계, 묘산, 적중, 대병 일대입니다. 이곳에는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에 지어진 흙담과 나무기둥의 고가들이 여전히 남아 있으며, 전통적인 가옥 형태와 생활 방식이 뚜렷하게 살아 있습니다. 이 지역 사람들은 대체로 관료 출신이 아닌, 서당 출신, 장날 상인, 약초꾼, 논갈이꾼 등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글을 읽었지만 벼슬하지 않았고, 기술을 가졌지만 부를 좇지 않았던 조용한 민중의 삶이 이곳에 새겨져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 지역의 마을 구조는 단순한 집합체가 아니라 공동체적 윤리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왔습니다. 장독대를 공유하거나, 마을 우물을 공동으로 관리하는 등의 문화가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이는 조선 후기 유학이 민간 윤리로 전환되며 생활화된 결과이자, 불교, 유교, 도교가 혼합된 민간 사상의 뿌리가 깊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합천의 민중은 ‘보이지 않는 역사’를 구성한 주역이었습니다. 그들은 말보다는 몸으로, 책보다는 삶으로 자신의 시대를 기록해 왔으며, 그 기록은 지금도 합천의 골목과 논두렁 사이에서 조용히 발산되고 있습니다.

해인사 말고, 합천에 남은 종교와 철학의 흔적들

합천 하면 많은 분들께서 해인사를 먼저 떠올리십니다. 물론 해인사는 한국 불교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심지이며, 국보급 문화유산입니다. 그러나 합천에는 해인사 외에도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소규모 암자, 무속 신앙의 터전, 유교 서당과 서원터가 곳곳에 숨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홍류동 계곡 상류의 용천암, 적중면 일대에 위치한 무학사 같은 곳은 종단에 속한 대형 사찰이라기보다, 한 사람의 수행자 혹은 지역 민중의 정신적 중심으로 존재해 왔습니다. 용천암에는 20세기 초 불교 박해 속에서도 산속에서 수련을 이어간 여성 스님들의 흔적이 있으며, 무학사는 일제강점기 비밀 독립운동가들이 은신하던 장소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또한 합천은 조선 후기 남인 계열 유학자들의 은신처 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초계 정 씨 가문 중심으로 형성된 유학 공동체는 서원 철폐령 이후에도 사적 서당과 공부방을 통해 유학의 실천적 윤리와 사민교육을 이어갔습니다. 이들이 남긴 문집과 편지 대부분은 경전 강론보다는 마을 질서, 상호부조, 농사 윤리에 관한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어, 종교와 철학이 '삶의 기술'로 작동했음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합천이라는 고장은 단일 종교의 중심지가 아닌, 복합적 정신의 산실이었습니다. 해인사만을 보고 떠나는 합천 여행은, 어쩌면 이 도시의 절반도 보지 못하고 돌아오는 여정일 수 있습니다.

한국전쟁과 국가 폭력의 그림자 — 합천의 침묵을 읽다

합천은 한국전쟁 당시 가장 비극적인 민간인 학살 사건 중 하나가 벌어진 곳이기도 합니다. 바로 1951년 대병리 일대에서 발생한 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국가가 자체적으로 조직한 반공 조직원들을 다시 ‘의심’하며 공식 재판도 없이 대량으로 처형한 대표적인 국가 폭력 사례입니다.

수백 명의 민간인들이 끌려가 학살되었고, 그 유해는 지금도 황강 주변과 산기슭 어딘가에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유족들은 오랜 세월 동안 입을 닫고 살아야 했으며, 지역 사회 또한 이 사실을 외부로 알리는 데 큰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유족들과 지역 단체들의 노력으로 기억의 장소화가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대병면과 묘산면 일대에는 지금도 이름 모를 비석과 무덤이 산속에 덩그러니 놓여 있으며, 그 옆에는 누군가 놓고 간 들국화와 작은 목탁 하나가 조용히 그날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합천은 전쟁터가 아니었지만, 전쟁이 남긴 국가 폭력과 지역 공동체의 트라우마가 가장 강하게 새겨진 땅입니다. 평화로워 보이는 이 땅에는 억눌린 감정과 지워진 기록, 침묵의 역사가 고요히 쌓여 있으며, 우리는 그 침묵에 귀 기울이며 진짜 합천의 시간을 다시 써 나가야 합니다.

합천은 말이 적은 고장입니다. 하지만 그 침묵은 공백이 아니라, 삶의 겹이 너무 두꺼워 말을 아낀 결과입니다. 민중의 일상, 종교와 철학, 전쟁과 폭력의 기억까지 모두 이 땅에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합천을 걷는 이유는 유명한 절이나 산을 보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말없이 말해왔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여야 합니다. 조용한 마을, 오래된 돌담, 묘비 하나가 보여주는 시간들 속에, 합천은 지금도 조용히 자신을 기록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