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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의 봄, 과거를 걷다 (봄꽃길, 역사기행, 도보코스)

by see-sky 2025. 5. 7.

곡교천 시진
곡교천

봄은 새로운 시작의 계절이다. 그리고 그 시작에 가장 잘 어울리는 여행지는 '역사'와 '자연'이 동시에 공존하는 곳이다. 아산은 그런 의미에서 최고의 봄 도보 여행지다. 단순한 유적 답사나 꽃구경을 넘어, 그 땅에 새겨진 시간의 흔적을 직접 발로 밟으며 걷는 ‘체험형 역사기행’이 가능한 곳이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외암민속마을, 온양온천, 곡교천 벚꽃길을 따라 아산의 과거를 생생히 느낄 수 있는 봄 도보 코스를 소개하고자 한다.

봄꽃 따라 걷는 외암마을의 시간여행

외암민속마을은  ‘살아있는 민속촌’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여전히 실제 거주민이 거주하는 전통마을이며, 아산의 오랜 양반 문화를 그대로 간직한 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봄이 되면 이곳은 매화, 살구꽃, 산수유로 덮여 한 폭의 동양화 같은 풍경을 자아낸다. 하지만 외암마을의 진짜 매력은 그 겉모습보다 그 속에 담긴 조선 시대의 계급 구조, 가족문화, 농업 시스템 등 사회적 구조의 집약에 있다.

마을 중심에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주택 양식이 잘 보존된 고택들이 있다. ‘유형문화재 제123호’로 지정된 '고불맹사성 고택'은 조선 후기의 상류층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실물 자료이다. 내부 구조는 사적인 생활공간과 공적인 응접 공간이 엄격히 분리되어 있으며, 여성 공간은 외부 시선으로부터 철저히 차단되어 있어 유교적 가부장제의 흔적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마을 내에서는 정기적으로 ‘외암기록 전’이라는 전시가 진행되기도 하는데, 이때 공개되는 문서와 고서들은 외부에서는 볼 수 없는 민간 기록들로, 조선 후기에 토착화된 유교 문화가 어떻게 실생활에 녹아들었는지를 보여준다. 대부분의 관광객은 카메라로 풍경을 담지만, 진정한 외암마을의 가치는 그 풍경 아래 깊이 숨겨진 계층 문화와 민속 기록의 집합체라는 점이다. 도보 여행으로 마을을 한 바퀴 돌면, 단순한 마을 구경을 넘어 조선의 삶을 체험한 기분이 든다.

온양온천의 이면, 제국의 흔적을 따라

온양온천은 아산의 또 다른 얼굴이다. 수백 년간 왕실의 휴양지로 사랑받아온 이곳은 근대에 들어서며 외세의 영향과 함께 빠르게 변화했다. 특히 대한제국 시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온천은 단순한 ‘피로 해소의 장소’에서 ‘정치적 회담의 무대’로 변모했다. 고종은 외교적 압박 속에서도 온양을 자주 방문했으며, 그때마다 정치인, 외국 사절단과의 비공식 회담이 이뤄졌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사실은 대부분 관광 홍보 자료에는 나오지 않는 내용이다.

현재 남아 있는 ‘온양행궁’은 원형이 완벽하게 보존되지는 않았지만, 당시의 건축 양식과 회랑 구조에서 조선 말기 궁궐 건축의 단서를 찾을 수 있다. 특히 내부에는 온천수를 직접 끌어다 사용하던 시설이 남아 있는데, 이는 동아시아 궁중 문화에서도 흔치 않은 구조다. 건물 뒤편에 위치한 ‘행궁정원’은 한때 비밀 회담 장소로 쓰였던 곳으로, 이를 뒷받침하는 고종의 어필(御筆)이 지금도 일부 보관돼 있다.

도보로 온양온천역에서부터 시작해 주변을 천천히 걸으며 살펴보면 일제강점기 당시 지어진 병원, 여관, 일본식 목조 건축물들이 일부 남아 있거나 흔적이 남아 있다. 특히 '온양관광호텔' 부근에는 옛 온천욕장 자리가 있으며, 이 일대는 일본식 도시계획이 그대로 적용된 지역이다. 이런 흔적들을 하나하나 찾아가며 걷다 보면, 온양은 단순한 온천 도시가 아니라 ‘한국 근대사의 축소판’ 임을 실감하게 된다. 발로 걸으며 과거를 찾는 이 여정은 박물관보다 더 생생한 역사 체험이 된다.

곡교천 벚꽃길 아래, 독립운동의 발자취

곡교천 벚꽃길은 봄이면 수많은 관광객이 찾는 핫플레이스다. 하지만 이 화사한 길 아래엔 무거운 역사가 흐른다. 가장 대표적인 장소는 ‘현충사’다.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공간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 1920~30년대에는 청년들의 항일 결의대회와 밀회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당시 이순신의 애국심은 일제에 맞서는 구국의 상징으로 재해석되었고, 현충사를 중심으로 비밀 결사 조직이 모이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다.

곡교천을 따라 현충사로 가는 도보 코스는 단순한 산책로가 아니다. 걷다 보면 중간중간에 있는 안내판 없이 방치된 오래된 비석과 석물들에서 역사의 흔적을 읽을 수 있다. 특히 6.25 전쟁 직후 지역 청년들이 세운 ‘무명용사 위령비’는 현재 등록되지 않은 사적지지만 지역 주민들에겐 매우 중요한 기억의 장소다. 실제로 이 위령비 앞에서는 매년 4월이면 자발적인 추모제가 열리기도 한다.

곡교천 벚꽃길의 양 옆에는 예전 일본군이 활용하던 군사도로의 흔적이 일부 남아 있다. 도로와 벚나무 사이의 독특한 간격, 불균일한 나무 식재 방식은 일제 시기 일본 정원의 흔적을 따온 배치라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일부 나무는 ‘기념식수’ 형태로 심어진 것으로 확인되며, 뿌리에 식수 연도와 관련 인물의 이름이 적힌 비석이 묻혀 있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벚꽃이라는 낭만적 이미지 뒤에 숨겨진 식민과 전쟁, 저항의 역사는 곡교천 도보 여행의 의미를 한층 깊게 만들어준다.

아산은 봄꽃이 아름다운 도시일 뿐만 아니라, 과거의 흔적이 살아 숨 쉬는 곳이다. 외암마을에서는 조선의 삶을, 온양온천에서는 근대의 충돌을, 곡교천에서는 독립의 염원을 만날 수 있다. 이 모든 여정을 걸으며 경험한다면, 단순한 여행을 넘어 한 권의 역사책을 읽은 듯한 감동을 받을 수 있다. 꽃이 핀 길 위에서 과거와 마주하고 싶다면, 올봄 아산으로 떠나보자. 역사가 숨 쉬는 이 도시가 당신의 걸음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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