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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에서 배우는 역사 교실(– 죽도사, 영해읍성, 숨은 민속 유산)

by see-sky 2025. 3. 15.

영덕의 운치있는 초가의 사진
영덕의 운치 있는 초가

영덕은 대게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조용히 파도를 바라보며 걷다 보면, 그 너머에는 수천 년의 시간이 고요히 흐르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이 글에서는 바다 곁에서 숨을 쉬고 있는 영덕의 역사 유산을 따라 여행하며, 여행자분께서 직접 '살아 있는 역사 교실'에 들어선 듯한 경험을 하시도록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영덕이 들려주는 오래된 이야기들을 함께 만나보시길 바랍니다.

파도 옆에 앉은 시간, 죽도사에서 시작되는 역사 수업

영덕 여행의 첫걸음으로 가장 추천드릴 수 있는 장소는 바로 '죽도사(竹島寺)'입니다. 동해안 바닷가에 자리한 이 사찰은 그저 풍경이 아름다운 곳이 아닙니다. 신라시대 고승 원효대사가 이곳에서 수행을 했다는 전승이 남아 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인 승려들이 비밀리에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던 장소로도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죽도사는 영덕의 역사에서 고대와 근대를 연결하는 '시간의 교차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죽도사 경내에 들어서면, 석조불상과 목조대웅전, 그리고 암자 옆 기도처 등 조용한 유적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관광객들은 보통 바다 배경의 사진만 담고 가시지만, 이곳에는 숨은 이야기가 많습니다. 특히 대웅전 뒤편의 해풍이 부는 바위 위에는 '침묵의 기도터'로 불리는 공간이 있으며, 지역 어민들은 여전히 이곳에서 조업 전에 작은 절을 올리고 계십니다. 이는 단순한 신앙 행위가 아니라, 바다와 사람, 자연과 인간이 맺어온 수백 년의 협약과도 같습니다.

죽도사를 둘러보신 후에는 인근의 죽변항으로 잠시 이동하셔도 좋습니다. 이곳은 과거 조선시대 군선이 정박하던 작은 방어항이었으며, 바닷가에는 여전히 돌로 쌓은 '잠복터'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대부분의 지도나 여행안내서에는 나오지 않지만, 지역 노인들께 여쭤보면 옛 어민들 사이에서 구전되어 온 이야기까지 들으실 수 있습니다. 역사 공부는 박물관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영덕의 해풍 속에서도 충분히 배움은 시작될 수 있습니다.

골목이 가르쳐주는 조선과 독립, 영해읍성으로의 시간 여행

죽도사에서 북쪽으로 차를 몰고 이동하시면 '영해읍성'이라는, 비교적 잘 보존된 조선시대 읍성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보통은 경주의 월성이나 남한산성을 떠올리시겠지만, 이곳 영해읍성 역시 매우 중요한 방어시설로 기능하였으며, 조선 후기에는 동해안 감시체계의 핵심 거점이었습니다. 지금도 성벽 일부가 남아 있으며, 성 안팎으로는 관아 터, 장터 자리, 옛 우물터 등이 흩어져 있습니다.

성곽을 따라 걸어보시면, 조용한 돌길 끝자락에 다다르게 됩니다. 이곳은 1919년 3.1 운동 당시, 영덕 청년들과 유생들이 만세를 외치며 모였던 장소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영해 지역의 만세운동은 포항, 경주보다도 빠르게 전개되었으며, 일본 헌병대의 강경 진압으로 많은 이들이 체포되었습니다. 그중에는 '이주현 선생'이라는 여성 독립운동가도 포함되어 있었고, 그의 가옥 일부는 지금도 영해읍성 인근에 비공식적으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역사서를 통해서도 접하기 힘든 이야기들이, 이 조용한 동네 골목 안에는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입니다.

영해읍성의 특별한 점은, 마치 학생들을 위한 '야외 역사 교실'처럼 자연스럽게 구성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성벽 하나하나가 과거의 교과서이자, 마을 주민 한 분 한 분이 살아 있는 해설사 역할을 하십니다. 특히 봄철이면 지역 청소년들과 교사들이 함께 걷는 '역사 기행 수업'이 열리는데, 이는 단순한 체험학습이 아니라 세대를 잇는 기억의 의식이기도 합니다. 여행자 여러분도 이 공간에 발을 디디시는 순간, 마치 과거의 교실 안에 들어선 듯한 진중함을 느끼실 수 있습니다.

숨어 있는 이야기, 영덕의 길목에서 만나는 민속과 유산

역사는 거대한 유적지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마을 어귀의 바위 하나, 오래된 느티나무 아래에서도 중요한 문화적 단서들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영덕에는 이런 ‘숨은 역사적 장소’가 특히 많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고래불 해수욕장' 인근에 자리한 ‘해녀당’입니다.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이곳을 단순한 풍어제 장소로만 여기시지만, 사실 이곳은 조선 중기 이후 여성 해산물 채집자들의 **공동 쟁의처**로 활용되어 왔습니다. 무속, 불교, 민간신앙이 섞인 이 장소는 근대 이전 여성 공동체의 문화와 역할을 짐작케 해 줍니다.

또한, 남정면 인근 산자락에는 알려지지 않은 작은 절터가 하나 있습니다. 지금은 이름 없는 석탑과 기단만 남아 있지만, 인근 주민들은 이곳을 '말 못 할 절'이라 부릅니다. 이는 임진왜란 당시 왜군을 피해 마을 스님들이 산중으로 피신하면서 설립한 사찰이었다는 전승에 기반합니다. 공식적인 문화재 지정은 받지 못했지만, 지역 내에서는 '조용히 기도하면 꼭 응답받는다'는 믿음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지금도 가끔씩 등불이 켜진다고 합니다.

이처럼 영덕에는 많은 이야기가 지도 밖, 길목 어귀에 숨겨져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알아차리고, 조용히 귀 기울이시는 여행자분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기도 합니다. 역사는 책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발걸음 아래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영덕은 단순한 해변 도시가 아니라, 한 편의 두꺼운 역사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직접 읽고, 걷고, 느껴보시는 것만으로도 배움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영덕은 조용한 바다 마을이자 동시에 수많은 기억이 머무는 장소입니다. 죽도사의 기도, 읍성의 만세 함성, 해녀당의 제의까지— 이 모든 것이 오늘의 우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행자 여러분, 이제 영덕의 바람 속에서 조용한 ‘역사 수업’을 시작해 보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