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영주는 조선의 정신이 조용하게 계승되는 곳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선비의 도시라 불리고, 유교문화의 본향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더 깊고 조용한 시간들이 겹겹이 쌓여 있습니다. 돌담길 끝에서 마주하는 고택의 그림자, 부석사에서 바람처럼 스치는 불교적 여운, 그리고 골목과 서원 사이를 흐르는 조선의 정신. 이 모든 것이 ‘역사여행’이라는 이름으로 조용히 우리 앞에 다가옵니다. 이번 여행에서는 관광지로서의 영주가 아니라, ‘시간의 도시’로서의 영주를 걸어보며 덜 알려졌지만 본질적인 공간들을 중심으로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돌담길 끝에서 만난 유학의 풍경 – 소수서원과 선비의 집
소수서원은 일반적인 유교 교육기관이 아닙니다. 이곳은 조선시대 ‘사람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에 대한 대답이 담긴 공간입니다. 서원이 지금까지도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이유는, 그곳이 단지 책을 읽는 장소가 아니라, 철학과 생활이 함께 머무는 살아 있는 학교였기 때문입니다.
영주의 소수서원은 풍기군수 주세붕이 고려시대 백운동서당을 복원한 뒤, 조선 중종 때 성리학의 근본 사상가 안향을 기리는 곳으로 발전하였습니다. 그 후, 명종이 ‘소수(紹修)’라는 이름을 하사하면서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지요. 서원의 건물들은 바람과 햇살, 그리고 계곡의 흐름을 따라 배치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보는 직선적 궁궐과는 다르게,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품는 방식으로 조선의 공간 철학이 구현된 것입니다.
서원 옆으로는 고택이 이어지고, 돌담길 사이로는 붓글씨처럼 휘어진 마을길이 나타납니다. 이 길은 예사롭지 않은 이력을 품고 있습니다. 선비들이 걸었던 이 길은 단지 귀갓길이 아니라, 학문적 수행과 사회적 책임 사이를 오가던 ‘윤리의 통로’였습니다. 그 길을 지금 걷고 있는 우리는 자연스레 고개를 숙이고, 걸음을 늦추게 됩니다. 단지 오래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 존중할 무엇인가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서원 내부의 장서각과 문루는 비공개 공간이 많지만, 관람이 가능한 부분만으로도 유교 건축의 정제된 미학과 조선 시대 교육의 방향성을 충분히 체감하실 수 있습니다. 방문 후에는 근처의 소수박물관에 들러 안향, 주세붕, 이황 등 유교 인물들의 삶과 사상에 대한 보다 입체적인 설명을 함께 들어보시는 것도 큰 도움이 됩니다.
그림자가 말을 거는 곳, 부석사와 무량수전의 침묵
영주의 두 번째 장소는 단연 ‘부석사’입니다. 소백산 줄기 아래, 산길을 오르다 보면 바람이 갑자기 조용해지는 순간이 옵니다. 그 순간부터 우리는 무언가 다른 세계에 들어선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됩니다. 이곳은 단지 오래된 절이 아니라, 역사와 신화, 철학과 건축, 그리고 인간의 마음이 조우하는 공간입니다.
부석사의 무량수전은 고려시대 목조건축의 최고봉으로 꼽힙니다. 우리나라 현존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이기도 하며, 그 안에 모셔진 아미타불은 침묵 속에서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정면에서 바라보면, 기둥의 약간의 굴곡과 처마의 곡선이 마치 사람의 숨결처럼 느껴집니다. 건축이 ‘살아 있다’는 표현이 실감 나는 순간입니다.
이 절을 특별하게 만드는 또 다른 요소는 바로 ‘의상대사와 선묘 설화’입니다. 선묘라는 여인의 사랑과 기다림, 그리고 신화적인 승화는 부석사 전체에 고요하지만 강한 정서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부석사 뒤편의 암석인 ‘부석(浮石)’은 말 그대로 떠 있는 듯한 바위로, 그 전설의 상징물이기도 하지요. 이 바위 앞에 서면, 우리는 단지 종교적인 경외심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믿음’이라는 감정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감동을 받게 됩니다.
부석사에서는 오래 머무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사찰 입구에서 무량수전까지 올라가는 15분 남짓의 시간 동안 숨이 차지만, 그만큼 생각도 비워지고, 도착했을 때의 시야는 그 어떤 여행보다도 넓고 깊게 펼쳐집니다. 관광지가 아닌 ‘사유의 장소’로서 부석사를 바라보신다면, 그 감동은 훨씬 더 오래 남게 되실 것입니다.
영주는 지금도 시간을 쓰고 있습니다 – 골목과 사람, 잊힌 이야기
영주의 진짜 매력은 유명 유적보다도 그 유적들 사이에 놓인 ‘시간의 공백’을 걷는 데 있습니다. 소수서원에서 부석사까지, 혹은 시내 중심가에서 단산, 풍기읍까지— 여행자분들께서는 이 거리를 꼭 차량이 아닌, 도보와 대중교통을 활용해 천천히 이동해 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풍기읍은 한방의 고장으로 알려져 있지만, 일제강점기 당시 영주지역 항일운동의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풍기역 근처 골목에는 ‘풍기 독립운동 기념관’이 조용히 자리하고 있으며, 그 맞은편에는 일제 강점기 한약방으로 사용되던 100년 넘은 건물이 지금도 기능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선 지금도 ‘삶과 시간’이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영주 시내 중심지의 중앙시장 골목 안에는 눈에 띄지 않지만 오랜 세월 자리를 지킨 서점, 구멍가게, 찐빵집들이 존재합니다. 이곳은 그 어떤 유적보다도 ‘일상에 깃든 역사’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공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찐빵을 하나 사서 시장 골목을 거닐며 지나온 시간의 냄새를 맡고, 소박한 대화를 나눠보시는 것도 영주라는 도시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마지막으로, 여행의 끝엔 다시 소수서원 뒤편 돌담길을 걸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해가 기울 무렵, 담 너머로 노을이 스며들고, 까치가 지붕 위를 스쳐갈 때 그 돌 하나하나에도 조선의 시간이 얹혀 있는 것을 느끼실 수 있습니다. 영주는 조용하지만 조선의 정신이 잘 계승된 도시입니다. 관광지를 넘어, 한 시대의 정신이 머무는 곳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