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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에서 민주로, 경성과 관악 사이 — 서울대학교 100년 시간 여행

by see-sky 2025. 5. 19.

서울 대학교 정문 사진
서울대학교 정문

서울대학교는 단순하게  한국 최고의 국립대학이 아닙니다. 이 공간은 일제강점기 경성제국대학으로부터 시작되어, 해방 후 국가 재건, 산업화, 민주화의 격랑을 모두 품은 근현대사의 압축판입니다. 이 글은 서울대 캠퍼스를 '여행지'가 아닌 '기억의 현장'으로 바라보며, 그곳에 남은 시대의 흔적과 침묵하는 공간들을 따라 걷는 역사기행입니다.

경성에서 태어난 대학 – 서울대학교의 식민지적 출발

서울대학교의 시작은 1946년이 아닙니다. 많은 분들이 이 해를 ‘개교 연도’로 알고 계시지만, 실제 서울대의 뿌리는 1924년 일제가 세운 경성제국대학에 있습니다. 경성제국대학은 일본 제국이 식민지 엘리트를 양성하고 통치 이데올로기를 주입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에서 설립한 고등교육 기관이었습니다.

이 학교는 당시 일본인과 조선인을 철저히 분리하여 교육했고, 조선인 입학생 비율은 극히 낮았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 공부한 이들 중 일부는 해방 이후 독립국가의 초석이 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질적인 출발이, 역사의 역설이었던 셈입니다.

해방 후 미군정은 경성제국대학을 기반으로 서울대학교를 출범시킵니다. 9개의 전문학교가 통합되며 ‘국립 서울대학교’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이는 단지 교육 체계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해방된 국가의 상징적 제도화 작업이기도 했습니다.

서울대학교가 '민족의 대학'으로 자리 잡기까지는 수많은 논란과 반발이 있었습니다. 특히 ‘일제의 잔재’에 대한 비판은 지금까지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 학교의 출발은 민주주의나 평등한 교육이 아닌, 제국의 통치 도구였던 만큼, 서울대는 그 자체로 근대사의 이중성을 품고 있습니다.

오늘날 서울대학교 병원 앞에 서면, 그 전신인 경성의학전문학교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고, 옛 건물들 일부는 의도적으로 '기억되지 않도록' 리모델링되었습니다. 그러나 조용한 그 건물 벽면과 계단, 식민지 시절 사용되었던 강의실 잔재는 여전히 ‘과거를 지운 현재’로 존재합니다.

관악산 자락으로 옮겨온 이상과 갈등 – 국가, 교육, 민주주의의 충돌

1975년 서울대학교는 경성(현 종로·혜화 일대)에서 지금의 관악캠퍼스로 이전합니다. 이 변화는 단순한 물리적 이동이 아니라, 국가의 교육 통제와 이상주의 사이의 갈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서울 한복판에 위치한 서울대학교가 잦은 학생 시위와 반정부 활동의 진원지가 되는 것을 우려해, 외곽 지역으로 학교를 이전하기로 결정합니다. 관악산 깊숙한 산자락으로 옮겨진 서울대학교는 철저히 통제된 진입 도로, 높은 담장, 감시를 위한 캠퍼스 구조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관악캠퍼스는 ‘폐쇄적인 연구 중심 공간’으로 설계되었지만, 오히려 민주화운동의 주요 거점이 되었습니다. 1970~80년대 서울대학교는 유신 반대 시위, 전두환 정권 타도 운동, 학내 농성과 자유 언론 수호 투쟁의 최전선이었습니다. 그 상징적 장소가 바로 '자하연 분수대', 그리고 '학생회관(63동)'입니다. 이 두 공간은 당시 수많은 연설과 집회, 시위의 무대였으며 지금도 '조용한 기념비'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또한 캠퍼스 내에는 지금은 평범한 잔디밭으로 보이는 곳이, 당시 학우들의 피가 묻은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1986년 서울대 총학생회가 창립된 직후, 자하연 앞에서 벌어진 시위는 '서울대생 최초의 연행자 집단 발생'이라는 불명예의 기록을 남깁니다.

오늘날 관악캠퍼스를 산책하는 이들은 이 역사적 사실을 잘 모르고 지나칩니다. 하지만 민주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벤치 하나, 돌계단 하나, 심지어 우체통까지도 의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서울대 캠퍼스는 단지 공부하는 공간이 아니라, 이념과 통치, 이상과 현실이 격돌했던 국가의 축소판이었습니다.

돌계단과 도서관, 침묵하는 건물들 – 서울대가 품은 역사적 공간들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를 걷다 보면, 수많은 건물과 조형물이 보입니다. 하지만 그 건물들이 가진 ‘역사성’을 아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서울대학교는 겉으로 보기엔 현대적이고 기능적인 캠퍼스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정치적 상징, 이념적 충돌, 문화적 전환의 자취가 스며 있습니다.

예컨대 중앙도서관 뒤편, 자연대 건물 앞의 화단, 규장각 뒤편의 옛 기숙사 터 등은 지금은 아무 설명도 없는 공간이지만, 모두 서울대 내부 시위나 검거, 은신 장소로 사용되었던 곳들입니다. 당시 정문과 정문 밖 ‘녹두거리’는 사실상 정보기관과 경찰의 상시 감시구역이었으며, 학생들은 이를 피해 산길을 통해 은밀히 진입하거나 탈출하곤 했습니다.

또한, 서울대 캠퍼스에는 '설계상 의도된 통제 구조'가 존재합니다. 건물들이 산을 따라 길게 배치되어 있어 자연스럽게 학생들이 한 지점에 모이기 어렵도록 분산되어 있으며, 집회가 벌어질 경우 경찰 투입 동선을 효율화하도록 설계된 통로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서울대 학생들은 독자적인 언론 활동(관악, 대학신문), 독서토론회, 지하서클 활동, 철학 강좌 등을 이어갔고, 캠퍼스 곳곳은 이중적 기능—수업 공간이자 저항 공간—을 수행했습니다.

무엇보다 이 모든 것들은 잘 설명되지 않습니다. 서울대학교는 오늘날 '국립대학'이라는 정체성과 함께 ‘국가의 공공성’이라는 미션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그 안에는 침묵한 과거, 지워진 흔적들이 존재합니다.

학생회관 지하 문고의 벽면 낙서, 과방 안 회의록의 구절, 철거된 기숙사 담벼락의 구호 하나까지, 이 공간은 지금도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서울대는 어떤 대학이어야 하는가?” 그 질문은 곧, “우리는 어떤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더 큰 물음과 연결됩니다.

서울대학교는 대한민국 최고라는 타이틀을 넘어서, 제국과 민주, 식민과 해방, 권력과 지성, 침묵과 투쟁이 모두 얽힌 복합 공간입니다.

관악캠퍼스의 단풍길, 자하연의 물결, 규장각의 고요함, 과방의 찻잔 하나까지, 이곳은 ‘지금’만 있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과거’가 현재와 공존하는 지층입니다.

서울대를 여행한다는 건, 학문과 이상, 역사와 개인, 공공성과 국가의 복합적 균형을 다시 질문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이야말로 이 캠퍼스를 걷는 가장 깊은 이유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