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남쪽, 한적한 들판과 영산강이 만나는 도시에 과거의 '행정 수도'가 숨어 있습니다. 나주는 조선시대 내내 전라도를 대표하는 정치·행정 중심지였고, 고대 마한의 심장, 고려의 왕건과 조선의 선비, 근대의 여성 교육자까지 시대별 주인공들이 지나간 도시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역사가 말이 없습니다. 조용한 도시에 말을 걸면, 조선이 대답합니다.
강을 따라 걷는 조선 – 나주 금성관과 목사고을의 품격
나주를 걷는다는 것은 곧 조선을 걷는 일입니다. 조선시대 전라도를 대표하는 목(牧)이자, 전라도 관찰사가 머물던 정치적 수도였던 나주는 전라도 전체의 군현을 다스리던 ‘수부도시’였습니다. 지금의 말로 하면 전라남도청, 전라북도청의 본부가 동시에 존재하던 도시였던 셈입니다.
그 상징이자 중심이 된 장소가 바로 금성관입니다. 나주 금성관은 전국에 남아 있는 객사 중 가장 규모가 크고, 보존 상태가 완벽한 유일한 조선시대 관영 건축물입니다. 객사는 단순히 외부 인사를 접대하는 공간이 아니라, 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고 지방의 충절을 상징하는 공간이었습니다. 나주의 금성관은 전패를 모시는 정청, 관리와 관찰사, 유생들이 머물던 동헌과 서헌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규모나 구성 모두에서 조선시대 나주의 위상을 웅변합니다.
놀라운 점은, 이런 공간이 지금도 나주 원도심 한복판에 살아 있으며, 무료로 공개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대부분의 여행객은 이곳을 놓친 채 곧장 곰탕집이나 나주혁신도시로 향하곤 하지만, 이 정청의 단단한 기둥과 서늘한 마루에 앉으면, 조선시대 행정력의 무게감이 느껴질 만큼 공간 자체가 말을 겁니다.
금성관과 더불어 ‘나주목 관아’ 일대는 당시 교육, 재판, 부역, 행정, 시위, 의례가 모두 집결되었던 도시의 핵심 공간이었습니다. 그 중심을 이루는 홍살문과 금학헌, 동헌의 툇마루, 그리고 여인들이 조용히 머물던 부속 관청은 지금도 흔적을 간직하고 있으며, 누구도 크게 알리거나 홍보하지 않는 ‘조용한 유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처럼 나주는 ‘작은 도시’가 아니라, 이야기를 접은 큰 도시입니다. 그 침묵 속에, 조선의 질서와 권력이 어떻게 작동했는지가 또렷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마한의 기억 위에 조선이 서고, 여성들이 길을 낸 도시
나주라는 지명 자체가 단순히 ‘지방 소도시’를 뜻하지 않습니다. 이곳은 고대 마한의 연맹국 중심지였고, ‘나주 복암리 고분’과 같은 거대 옹관묘들이 이 지역이 한때 독자적 문화권의 중심이었음을 입증합니다. 즉, 나주는 고대부터 ‘한반도 남서부의 정신적 중심’이었고, 조선은 그 기억 위에 새로운 권력을 덧칠한 셈입니다.
이런 다층적 역사성은 나주의 지명과 골목 이름, 마을 구조에도 남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영산포’, ‘죽림동’, ‘서내동’ 같은 지명들은 고대의 무역과 교통 중심지로서의 흔적이며, ‘동점문’, ‘서성문’은 조선시대 읍성 구조의 일환으로 당시 도시 계획의 선진성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나주가 정말 독특한 점은, 여성의 역사를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나주는 근대 여성 교육의 출발점 중 하나로서, ‘나주 순성여학교’는 호남 최초의 근대 여성 교육 기관입니다. 이 학교는 한국전쟁 이후 소멸되었지만, 당시 여학생들의 졸업 앨범, 교복, 유물 일부는 나주향교 유물전시관에 남아 있어 전근대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여성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가 됩니다.
또한 나주는 일제강점기 유배의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정약용이 유배된 강진에 비해 덜 알려졌지만, 나주 역시 수많은 개화기 지식인과 불온서적 독자들이 몰래 유입되고 은신하던 곳이었으며, 일부는 이곳의 향교나 서원에서 정치적 토론과 교육을 이어갔습니다.
즉, 나주는 소리 내지 않고 역사를 만든 도시입니다. 강력하지 않지만 견고했고, 화려하진 않지만 그만큼 지속적인 정신의 도시였습니다.
곰탕만 말고 곁의 것들 – 나주 향토의 맛과 기억의 뒷맛
나주 하면 곧잘 떠오르는 것이 곰탕입니다. 물론 나주곰탕은 뽀얀 사골국물에 담백한 수육과 적당히 쫀득한 고기결이 어우러진 향토 명물이며, 과거 나주 관아에서 접대용으로도 자주 쓰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진짜 나주의 향토음식은 그 옆에 조용히 놓여 있는 것들입니다.
예를 들어 영산포 홍어삼합은 전남 전역에 퍼져 있지만, 사실상 가장 오래된 전통 유통 시장은 나주였습니다. 특히 겨울철 영산강 하구에 형성된 ‘홍어 건조장’과 ‘나주장날’은 순천과 목포를 아우르는 홍어 교역 중심지였으며, 지금도 ‘홍어 삭히는 집’의 몇몇 장인들이 나주 남평 일대에 남아 있습니다.
또한 ‘나주 배’를 단순히 과일로만 보는 것은 절반의 이해에 불과합니다. 배는 조선시대 나주목의 진상품이자, 한양으로 진상되는 남도의 상징적 농산물이었습니다. 이 배를 보호하기 위한 뽕나무 울타리, 수로 체계, 배나무 묘목장 등은 지금도 나주 외곽에 남아 있으며, 몇몇 농가에서는 전통 방식으로 배 정과를 만들어 관광객에게 약과처럼 나눠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꼭 소개해드리고 싶은 한 가지는 나주 식혜입니다. 곰탕 국물의 느끼함을 잡기 위해 조선시대 관아에서는 생강과 엿기름, 조청을 넣은 맑은 식혜를 함께 제공했으며, 이 전통은 지금도 나주 원도심의 몇몇 상점에서 맛볼 수 있습니다. 특히 식혜에 들어가는 차조와 보리쌀의 비율은 나주 지역의 토양과 생산방식에서 유래한 것으로, 지역성 자체가 한 그릇에 담긴 ‘음식의 민속지’라 할 수 있습니다.
즉, 나주의 음식은 단지 배부름을 넘어 역사와 계절, 권력과 민속이 스며든 또 하나의 기록입니다. 음식은 말을 하지 않지만, 그 시대 사람들의 마음을 가장 조용하게 증언하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나주를 걷는다는 건, 그냥 한적한 도시를 산책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침묵한 조선의 권력, 사라진 여성의 교육, 지워진 고대 마한의 흔적, 그리고 지금은 잘 알려지지 않은 음식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조용히 귀 기울이는 일입니다.
나주는 서울이나 경주처럼 많은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걸음을 멈추고 담장을 바라보거나, 골목에 남은 벽돌 하나를 만지면 그 도시는 우리보다 먼저 말을 걸어옵니다.
그렇게 나주는 오늘도, ‘이야기가 너무 많아 오히려 조용한 도시’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