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원은 한국전쟁의 상처가 가장 깊게 새겨진 땅이자, 전쟁이 끝나지 않은 현실 속에서도 자연과 사람이 회복을 시도한 평화의 실험장입니다. 끊긴 철로, 무너진 수도, 사라진 마을… 그러나 그 철책 너머에는 새들이 돌아오고, 꽃이 피고, 사람이 걷는 길이 있습니다. 이 글은 DMZ와 철원이라는 공간에 담긴 ‘한국사 그 이후의 이야기’를 걷는 기록입니다.
총성의 기억 위에 핀 길 – 철원 평야와 노동당사 이야기
철원은 분단 이전엔 강원도 철원군의 중심이었고, 해방 후에는 북한의 행정수도, 군사 전략의 요충지, 그리고 전쟁 후에는 완전한 폐허로 남겨진 곳입니다. 이 지역의 대표적 상징이 바로 노동당사입니다.
노동당 사는 북한이 1946년 철원을 접수한 뒤 지은 건물로, 과거에는 공산당 회합, 숙청, 선전 교육 등이 이루어진 정치 공간이었습니다. 3층 붉은 벽돌 건물은 아직도 총탄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고, 내부는 폐허이지만, 그 침묵 속에 냉전의 논리와 분단의 감정이 뼈처럼 박혀 있습니다.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이 건물은, 지금도 민간인 통제구역 안쪽에 있어 허가된 시간과 조건 하에만 접근할 수 있으며, 그 자체로 ‘철책 너머의 과거’를 응시하는 기억의 창문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노동당사 뒤편에는 철원평야가 펼쳐집니다. 이 광활한 들판은 한국전쟁 당시 전투가 치열했던 격전지였고, 지금은 논밭과 습지, 두루미 보호 구역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특히 비무장지대 인근의 철새 도래지는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생태 복원 지역이며, 두루미와 재두루미가 철원에서 겨울을 나기 위해 돌아오는 일은 전쟁이 낳은 침묵 위에 새 생명이 둥지를 튼 기적 같은 일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철원은 전쟁의 유물과 자연의 회복력이 공존하는 드문 공간입니다. 총성과 철조망 사이에서도 길은 나고, 그 길 위를 사람과 새, 기억과 미래가 함께 걷고 있습니다.
철도는 끊겼고 말은 사라졌지만 – 금강산 철길과 월정리역의 침묵
철원에는 끊긴 철도가 있습니다. 금강산까지 이어졌던 경원선 철도, 그중 월정리역은 지금은 ‘멈춘 역’이자, ‘침묵의 역’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곳은 2002년 한때 남북 연결의 희망을 품고 복원되었고, 평화열차가 정차하던 역사도 있습니다. 하지만 북한과의 관계 악화로 운행이 중단되면서, 철로는 다시 녹슬고 플랫폼에는 잡초가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정거장은 지금 ‘가장 평화로운 전시공간’으로 변화되었습니다. 플랫폼 끝에 있는 "철마는 달리고 싶다"라는 문구는 끊긴 철로의 아픔과, 연결의 염원을 동시에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월정리역 주변에는, ‘잊힌 사람들’의 흔적이 있습니다. 철원 지역은 전쟁 후 민간인 접근이 수십 년간 금지되면서, 마을 전체가 지도에서 지워지기도 했습니다.
이후 일부 마을은 군 작전과 감시를 위한 공간으로 흡수되었고, 일부는 소를 키우는 사람들과 감시병이 함께 사는 모순적인 공간으로 재편되었습니다.
실제로 DMZ 인근에서는 초소 근무 중인 병사와 낙농업자 사이의 인사가 이질적이면서도 이상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경계와 일상이 공존하는 풍경이 철원만이 지닌 독특한 정서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끊긴 철도, 버려진 마을, 말 없는 병사들 사이에 사람들이 다시 걷는 길, 그것이 바로 DMZ 평화누리길입니다. 이 길을 걷는다는 것은 침묵의 공간에서 연결의 가능성을 다시 상상하는 일입니다.
경계의 밥상 – 철원의 민초가 지켜온 음식 이야기
전쟁은 모든 것을 바꿨지만, 사람들이 입에 넣는 음식만은 쉽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철원은 전쟁 전에는 한반도 최대의 벼농사 지역 중 하나였고, 전쟁 후에는 낙농과 밭농사 중심의 식량 재건지로 전환되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향토 음식은 철원 오대쌀밥입니다. 철원 오대쌀은 단단한 입자와 진한 향, 고슬고슬한 식감으로 일제강점기에도 ‘헌납미’로 보내졌던 고급 쌀이었습니다. 지금도 철원군의 식당에서는, 쌀밥 하나만으로 식사를 구성하는 정갈한 백반 중심의 향토 밥상을 경험하실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지역 음식은 철원 한우국밥입니다. 철원은 군사 통제구역 안에 넓은 방목지가 조성되어 있어, 오염되지 않은 목초지에서 자란 한우가 주요 특산품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특히 고기 대신 국물 중심으로 끓여낸 맑은 스타일의 한우국밥은, 민간인과 군인이 함께 먹던 전시형 식문화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철원 지역에선 또한 청국장과 두부가 빠질 수 없습니다. 군부대에 납품되기 위해 청결하고 대량 생산 가능한 전통 방식의 청국장 제조법이 정착되었고, 철원 특유의 기후 덕분에 두부의 단단함과 향이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이러한 음식은 단순한 식사가 아닌, 전쟁 이후에도 살아남아야 했던 사람들의 생존 방식이자,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 침묵의 미각입니다.
침묵하는 땅에서 자라난 쌀, 군사 경계선 아래에서 익은 장, 그리고 말없이 익어가는 밥상. 그 모든 것이 철원이라는 공간의 또 다른 역사입니다.
철원은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은 전쟁을 안고 사는 땅입니다. 그러나 그 땅은 이제, 상처를 품은 채 자연과 기억, 생명과 사람이 함께 숨 쉬는 길로 바뀌고 있습니다.
철책은 남아 있지만, 그 철책 너머로 꽃이 피고, 길이 이어지고, 말 없는 기억이 오늘의 우리를 조용히 부르고 있습니다.
철원 DMZ에서 걷는다는 것은 과거의 비극을 견디고 피어난 평화의 가능성 위를 걷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 우리는 ‘잊지 않겠다’는 다짐 대신, ‘다시 잇겠다’는 다짐을 품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