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은 철강의 도시이자, 바다의 도시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미지 뒤편에는 지도에는 잘 나타나지 않는, 그리고 누구도 자세히 들려주지 않는 역사가 숨어 있습니다. 고대 해상세력의 흔적부터 산업화 이면에 감춰진 노동자들의 이야기까지, 이 글에서는 ‘철강’이라는 단어로 덮여버린 포항의 진짜 유산을 따라 걸어보려 합니다.
고대의 바다를 건넌 도시, 철 이전의 포항을 보다
포항이라는 지명은 흔히 철강과 포스코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철이 이 도시의 정체성을 규정하게 된 것은 불과 반세기 남짓한 일입니다.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이곳은 고대 삼국의 해상 네트워크 중심지였으며, 그 흔적은 지금도 지도 밖의 유적들 속에 생생히 남아 있습니다.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장기 고분군이 있습니다. 포항시 남구 장기면에 위치한 이 고분들은 신라 중심의 기록에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지만, 실제로는 고대 포항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였음을 보여주는 귀중한 증거입니다. 장기 지역은 오랜 기간 독립된 소국 형태를 유지하다 신라에 병합되었으며, 그 흔적은 봉분의 축조 방식과 무덤 내부 유물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일본 규슈계 토기나 해상 교류 흔적이 발견되어, 포항이 내륙보다는 바다를 통해 더 많은 문명과 교류했음을 시사합니다.
또한, 잘 알려지지 않은 구룡포 선착장 인근에는 과거 일제 강점기 조선 해녀들이 생계를 위한 집회를 열었던 장소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간이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당시 포항 지역 해녀들이 노동조합 형태로 목소리를 냈던 이곳은 한국 노동운동사의 숨겨진 출발점 중 하나로 평가받을 수 있습니다. 공식적인 문화재나 표지석은 없지만, 당시의 신문 자료와 구술 기록을 통해 그 의미를 재조명할 수 있습니다.
철강이 도시를 상징하기 전, 포항은 해양왕국의 전초기지였습니다. 삶과 신앙, 권력이 바다 위에서 움직이던 이 공간은 오늘날의 지도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우리가 직접 걸으며 되새길 때 비로소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포스코의 그림자, 침묵한 노동자들의 발자취
포항의 현대사는 포스코 없이 설명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포스코만으로 포항을 정의하려는 시도는 수많은 노동자들의 고통과 희생을 지워버리는 일과도 같습니다. ‘철강왕국’이라는 명성 이면에는 말해지지 않은, 기록되지 않은 노동의 역사가 있습니다.
1968년 포항종합제철(현 포스코)이 착공되던 시기, 포항은 한적한 어촌 도시였습니다. 정부 주도로 대규모 철강 산업이 들어서면서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청년 노동자들이 이 도시에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들 중 상당수는 10평도 안 되는 임시 합판 숙소에서 지내며, 화장실도 없는 현장에서 하루 14시간 넘게 노동하였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역사책 어디에도 남지 않았지만, 기억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포항 북구 송도 일대의 ‘구 제철촌’ 골목에서는 지금도 당시를 기억하는 후손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1970년대 후반, 포항은 한국 노동운동의 주요 무대가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군사정권 하에서 이러한 움직임은 철저히 은폐되었습니다. 예컨대 1978년 발생한 ‘포항제철 안전사고 은폐 사건’은 사망자와 중상자가 다수 발생하였음에도 단 한 줄의 언론 보도 없이 넘어갔습니다. 포스코 내부 보고서에는 단지 ‘공정 개선 중 사고 발생’이라는 짧은 문구로 처리되었습니다.
이렇듯 포항의 산업화는 찬란한 발전의 서사 속에 누락된 이름들과 침묵을 남겼습니다. 그들의 노동과 시간이 사라진 지금, 우리는 그 흔적을 찾기 위해 여전히 지도에 나오지 않는 길 위를 걸어야만 합니다.
골목에서 시작된 기억, 포항의 구도심을 다시 보다
포항은 근래 들어 새롭게 개발된 공간이 많습니다. 그러나 도시의 진짜 이야기는 지워지고 낡은 곳에서 들려옵니다. 포항 중앙시장과 송도 구도심은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습니다. 관광객들이 해산물 식당을 찾는 동안, 이곳은 지난 한 세기 동안 포항의 정치, 경제, 사회가 부딪히고 형성된 골목이었습니다.
중앙시장 인근에 있는 구 일본인 상점가는 한때 경상북도 최대의 조선인 경제활동 중심지였습니다. 해방 직후 포항 시민들은 이 지역을 자발적으로 점거하고 스스로 시장을 운영하였으며, 1946년에는 ‘시장 자치조직’을 만들어 미국 군정에 대항하고 지역 내 자립경제를 추진하였습니다. 이는 경제 활동을 넘어, 당시 포항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민주적 공동체 실험이기도 했습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 구역을 중심으로 비공식적인 야학과 지하 노동자 집회가 열렸습니다. 송도동 철거 예정지에는 노동자들이 모여 야학을 운영하며 한글을 배우고 노동법을 공부하였습니다. 당시 참여자 대부분은 중졸 이하의 학력으로, ‘노동자의 권리’조차 생소한 개념이었지만, 그 골목 안에서는 작지만 중요한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오늘날에는 낙후된 구역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이 골목은 포항의 뿌리와도 같은 공간입니다. 빛나는 고층 건물이나 현대식 박물관이 말해주지 못하는 이야기들이 이곳에는 담겨 있으며, 그것이야말로 진짜 역사의 현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포항은 산업화된 도시입니다. 그러나 그 아래에는 지도에 표시되지 않는, 다만 기억 속에 살아 숨 쉬는 역사가 존재합니다. 고대의 바닷길, 철의 도시를 만든 노동자들의 발걸음, 그리고 골목에서 시작된 조용한 혁명까지. 이제 우리는 표지판 없는 길을 걸으며, 그곳에서 비로소 포항의 진짜 과거를 만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