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은 수천 년 동안 숨은 사람들, 숨긴 진실, 잊힌 목소리들이 교차하며 켜켜이 쌓인 역사적 지층입니다. 신라의 고승, 고려의 도인, 조선의 유배자,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한국전쟁의 빨치산까지… 지리산은 언제나 ‘숨은 존재’들을 품어왔습니다. 오늘은 그 은둔의 기억을 따라, 지리산이라는 가장 조용한 역사서를 펼쳐보려 합니다.
도망과 도의 경계 — 지리산, 은둔의 성소
예로부터 지리산은 ‘신선이 머문 산’으로 불렸습니다. 하지만 그 신선들은 단순한 전설 속 존재가 아니라, 실제로 이곳에 몸을 숨기고 살았던 수많은 역사 속 인물들이었습니다. 고대에는 고승들이 정토를 찾기 위해 이 산을 찾았고, 조선 시대에는 유배지와 유학자들의 은둔처로,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들의 피신지로 활용되곤 했습니다.
지리산의 은둔문화는 단지 자연을 좋아하는 삶이 아니라, 정치적이고 철학적인 선택이었습니다. 격동의 사회 속에서 지리산은 피신처이자, 새로운 사유와 공동체가 탄생하는 장소였습니다. 실제로 남명 조식 선생의 제자들이 후학을 양성하며 머물렀던 덕산골, 유학자 이행원이 칠선계곡 인근에서 은거록을 집필한 일화 등은 오늘날 관광 안내서에는 잘 나오지 않지만 지역 어르신들의 기억과 기록 속에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주목할 점은, 은둔자들이 지리산 안에서 단절된 삶을 산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지역 주민들과 교류하며 농사를 짓고 글을 가르쳤으며, 산 아래와 위를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지리산 사상’이라는 표현이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자연과의 단순한 일체가 아니라, 사회를 비판하며 대안을 고민했던 사유의 철학이었습니다.
불교, 유교, 무속이 뒤섞인 산 — 지리산 종교의 지층
지리산은 한국 종교의 축소판이라 불릴 정도로 다양한 종교 전통이 공존하는 산입니다. 고즈넉한 절터, 수백 년 된 사찰, 조용한 암자들과 함께 무속당과 서낭당, 서원들이 이곳저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처럼 복합적인 종교 지형은 한 민족의 정신사적 흐름을 보여주는 귀중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사찰로는 신라시대에 창건된 화엄사, 임진왜란 당시 승병의 중심지였던 연곡사가 있으며, 알려지지 않은 수도암, 금선암 등의 암자는 은둔자들이 실제 거주했던 장소로 추정됩니다. 이들 공간은 표지판 하나 없는 채, 벽에 새겨진 불경 구절, 단청의 흔적 등으로만 존재를 알리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무속 신앙의 흔적도 지리산 곳곳에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칠불사 가는 길목의 서낭당, 토지면 일대에 흩어져 있는 당집, 백무동 계곡의 마애불 등은 산을 신성시했던 민간 신앙의 흔적입니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불교, 무속, 유교가 분리되지 않고 공존하며 혼합된 상태로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마을 행사에 스님이 참석하고, 무당이 서원 인근에서 굿을 올리며, 유생이 불경을 공부했던 기록들은 지리산만의 종교적 관용성과 포용성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이처럼 지리산은 단순한 종교의 공간을 넘어 정신적 해방구로 기능해 왔습니다. 이 산을 따라 걷는 것은 신앙을 넘어, 사람들이 생명을 걸고 지키려 했던 세계관과 삶의 태도를 마주하는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총성과 기도 사이 — 지리산의 현대사, 빨치산과 민간의 이야기
지리산의 역사에서 가장 조용히 다뤄지는 시기는 바로 빨치산 전쟁의 시기입니다. 한국전쟁 전후 약 10년 동안 지리산 일대는 제2의 전쟁터였습니다. 낙동강 방어선이 무너지며 북한군 및 남한 내 좌익 세력이 지리산에 잠입했고, 국군과 미군은 이를 토벌하기 위해 지리산을 완전히 봉쇄하는 작전을 수차례 감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전쟁은 공식 전선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가장 많은 희생을 치른 이들은 다름 아닌 일반 민간인이었습니다. 피난민과 빨치산의 구분이 모호했던 탓에, 마을 주민들이 ‘의심’만으로 체포되거나 처형되었던 사례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 지리산을 둘러싼 지역에는 아직도 빨치산에 대한 증오와 연민, 애정과 공포가 뒤섞여 있는 복합적인 감정이 존재합니다.
하동, 산청, 구례, 남원 등 지리산 자락의 마을 곳곳에는 당시를 기억하는 노인들의 증언이 민간전승처럼 조용히 전해지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단순 피난민이었는데도 끌려갔다”, “빨치산이 마을에 내려와 밥을 달라 하자 거절 못하고 주었더니 취조를 당했다” 같은 이야기들이 그 예입니다.
실제 빨치산들이 숨어 지냈던 통로, 은신처, 약품 은닉자 등은 지금도 백무동, 뱀사골, 덕평계곡, 칠선계곡 등 고지대에 존재합니다. 표지판 하나 없이 침묵으로 덮인 그 숲길은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이 전쟁은 단지 이념의 대립이 아니라, 지리산이라는 공간에 쌓인 인간의 복잡성과 시대의 비극을 증언하는 역사이기도 합니다.
지리산은 높지는 않지만 깊습니다. 하늘보다 깊은 그 땅에는, 수천 년에 걸친 은둔의 역사와 저항의 철학, 기도의 울림이 켜켜이 쌓여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남긴 흔적이자, 자연이 품어준 기억입니다.
이 산을 걷는다는 것은 자연을 바라보는 여행이 아닙니다. 사람이 사라진 자리, 목소리가 금지되었던 기억, 기도와 총성이 함께 했던 그 흔적을 듣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 산의 깊이를 다시 걸어야 합니다. 역사는 언제나 산속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