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하동의 역사 속으로 (섬진강, 유학정신, 은둔문화)

by see-sky 2025. 5. 6.

섬진강 사진
섬진강 봄꽃 정경

하동은  섬진강의 풍경과 녹차 향기만을 담고 있는 고장이 아닙니다. 이 땅에는 시간이 느리게 흐르고, 말보다 사유가 앞섰던 선비들의 흔적이 고요하게 남아 있습니다. 이번 여행은 속도를 늦추고, 하동이 품은 ‘생각하는 역사’를 직접 걷는 여정입니다. 지도 밖의 하동, 그리고 조용히 말을 거는 고택과 강물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과거와 마주하게 됩니다.

섬진강, 시간을 감싸 안은 강의 철학

섬진강은  우리가 알고 있는 흔한 물줄기가 아닙니다. 하동을 가로지르는 이 강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자연의 철학을 품고 있습니다. 특히 하동에서 바라본 섬진강은 어떤 설명도 필요 없는 ‘자연 사유의 공간’입니다. 고운 모래와 돌멩이, 사철 맑은 물이 흐르는 강은 선비들이 사색에 잠기던 철학의 무대이기도 했습니다.

하동의 섬진강변에는 사찰이나 서원이 드문드문 들어서 있는데, 이는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물이 머무는 곳에 기운이 모인다'는 풍수 개념에 따라 자리를 잡았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도 쌍계사와 화개동천은 단순히 불교 유산으로만 보기 어려운, 정신적 풍경이 깃든 장소입니다. 이곳은 유배되거나 현실 정치에서 벗어난 인물들이 거처하며 자신을 갈고닦았던 공간입니다. 그들이 남긴 흔적은 벽서나 시구, 고목나무 아래의 돌비석 같은 형태로 남아 있습니다.

이처럼 섬진강은 단지 자연이 아닌, 시대의 흐름과 사람들의 사유가 깃든 역사적 강입니다. 우리가 하동을 여행하며 이 강을 따라 걷는다는 건, 단순한 자연산책이 아니라 조선의 시간과 철학을 거슬러 올라가는 행위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시작점이자 끝은 섬진강의 잔잔한 물결 속에 숨어 있는 것입니다.

은둔의 미학, 하동의 고택들이 말하는 것들

하동의 고택은 ‘볼거리’가 아니라 ‘머무를 거리’입니다. 겉으로 보기엔 오래된 기와와 낡은 목재가 전부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조선 선비들의 철학과 생활, 그리고 은둔의 미학이 농축되어 있습니다. 많은 여행자들이 ‘최참판댁’만을 떠올리지만, 하동에는 그것보다 더 깊은 이야기와 시간이 켜켜이 쌓인 집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예컨대 화개면의 어느 무명 고택은 과거 이름난 유생이 후학을 가르치며 살았던 곳으로, 그 내부에는 책장이 아닌 벽면에 직접 시구를 새긴 흔적이 있습니다. 또한 마루 밑바닥엔 소금이나 약초를 보관하던 작은 공간이 있어, 단순히 생활을 위한 주거지를 넘어 생존과 정신 수련의 공간으로 활용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하동의 고택이 단순한 과거의 유물이나 사진 찍는 장소가 아닌, 사람의 삶과 시대정신이 배어 있는 살아있는 유산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고택들 대부분은 소유주가 대를 이어 살아가고 있어, 박물관화된 타 지역의 고택과는 다른 생동감을 지닙니다. 방문객이 많지 않다 보니 조용한 분위기에서 그 집이 간직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 있으며, 정자에 앉아 마당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은둔과 사유의 기운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경험은, 빠르게 소비되는 관광지에서는 절대 맛볼 수 없는 하동만의 ‘느린 역사 여행’의 진수입니다.

남명 조식, 하동의 정신적 기둥을 세우다

하동은  유배의 땅이나 은둔의 고장이 아닙니다. 이곳은 조선 중기 유학자 남명 조식 선생의 철학이 피어난 토양이기도 합니다. 남명은 퇴계 이황과 함께 조선 유학을 대표하는 인물이지만, 그 철학은 더 실천적이고 민중 친화적이었습니다. 그는 지식인으로서의 도리를 ‘실천’에 두었고, 하동의 수많은 제자들과 지역 민중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특히 하동의 ‘덕천서원’은 그의 제자들이 세운 공간으로, 단순한 강학소를 넘어 하동 지역 전체를 유학 정신으로 관통하는 구심점 역할을 했습니다. 이 서원에서는 형식적인 강론이 아닌,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도덕과 공동체 윤리를 중심으로 한 교육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하동 지역민의 공동체 의식과 깊은 사색의 문화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또한 남명은 자연과 함께하는 삶을 강조하며, 자연 속에서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체득하라는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하동의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관계는 그 철학의 실현 공간이었고, 지금도 그의 정신은 지역의 정자, 서원, 문집 등을 통해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습니다. 남명의 하동은 과거에 머물지 않으며, 오늘날 우리의 삶에도 적용 가능한 느림의 가치와 공동체의 지혜를 품고 있는 고장입니다.

하동 여행은 눈으로 보는 관광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을 느끼는 사유의 여정입니다. 섬진강을 따라 걷고, 고택의 마루에 앉아 선비의 흔적을 상상하며, 서원에서 정신의 뿌리를 되짚는 이 길은 단순한 과거 체험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삶에서 잊힌 느림과 깊이, 인간됨의 가치를 다시 배우는 여정입니다. 하동은 말없이 말합니다. 그리고 그 말에 귀 기울이는 자만이, 진짜 여행자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