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통주는 단지 술이란 그 자체에 큰 의미를 두지는 않습니다. 그 안에는 누룩을 띄우는 계절의 시간표가 있고, 고두밥을 찌는 집안의 여성들이 있으며, 술을 올리는 손끝과 받는 예법에 담긴 문화적 약속이 존재합니다. 말술과 약주 사이, 식전과 제례 사이, 서민과 양반 사이의 한 잔에는 우리가 쉽게 보지 못했던 한국인의 삶과 태도, 그리고 사회의 구조가 응축되어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흔히 간과되기 쉬운 전통주 속 '보이지 않는 풍경'들을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밥이 술이 되는 시간 – 고두밥, 누룩, 그리고 여성의 술
한국의 전통주는 쌀과 물, 누룩으로 만들어집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재료는 다름 아닌 ‘고두밥’입니다. 고두밥은 찰기 있는 밥을 뜸 들여 지은 것으로, 곡물의 전분이 잘게 쪼개지고 균이 발효되기 적합한 형태를 갖춘 상태를 말합니다. 고두밥을 찌는 일은 대개 가정 내 여성의 몫이었으며, 술을 빚는 행위 자체가 여성의 손끝에서 비롯되었기에 ‘술맛은 그 집안 여자의 손맛’이라는 말도 전해집니다.
술을 빚는 과정은 단지 주방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집안의 큰일, 제사, 결혼식, 출산 등 주요 의례마다 술이 반드시 동반되었고, 그때마다 일정량의 술을 직접 담그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졌습니다. 특히 제사에 사용되는 술은 ‘감주’ 혹은 ‘청주’ 형태로 맑게 걸러져야 했으며, 이 과정에서 누룩을 어떻게 띄우는가, 발효 시간을 얼마나 잡는가가 술의 향미를 결정지었습니다. 즉, 제례요 술은 단순히 알코올이 아니라 ‘신에게 올리는 음식’이자 ‘집안의 품격을 보여주는 문화적 상징’이었습니다.
전통주에서 눈여겨볼 점은, 이러한 술문화가 오랫동안 비공식적인 여성의 노동에 의존해 왔다는 사실입니다. 양조장을 운영하는 경우는 드물었지만, 한 집안의 술맛은 바로 ‘맏며느리의 실력’으로 평가받았습니다. 이는 술이 단지 마시는 것이 아니라 ‘가족과 조상을 잇는 도구’였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전통적인 가양주의 전통은 일부 지역에서 여성 장인들에 의해 조용히 이어지고 있으며, 그 속에는 계절과 가족, 그리고 시간을 버무린 깊은 문화적 맥락이 녹아 있습니다.
말술과 약주 사이 – 술로 나뉘던 계층과 문화의 미묘한 풍경
한국의 전통주 문화에서 자주 들리는 단어 중 하나가 ‘말술’입니다. 보통은 ‘많이 마시는 술’ 정도로 해석되지만, 말술이라는 표현에는 단순한 양뿐 아니라 계층적, 태도적 의미가 함께 담겨 있습니다. 말술은 주로 서민층에서, 넉넉한 안주 없이 허겁지겁 마시는 술을 의미했고, 반면 양반 계층은 술을 천천히, 작게 따라 마시는 ‘약주’를 선호했습니다.
약주란 곧 ‘약처럼 마시는 술’이라는 의미이며, 실제로 약리적 효과도 기대되었습니다. 침향, 계피, 생강 등 약재를 넣어 빚은 술은 몸을 덥히고 소화를 돕는다고 여겨졌고, 이러한 술은 대부분 제사상에 함께 올려지거나, 병중에 있는 어른께 드리는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즉, 약주는 단지 양반의 기호품이 아니라, 의례와 의료의 경계에서 기능하던 술이었던 것입니다.
술잔의 크기와 모양 또한 계층과 지역에 따라 다르게 발전했습니다. 양반들은 손끝에 살짝 올릴 수 있는 작은 백자잔이나 청자잔을 선호하였고, 잔을 들 때도 두 손으로 공손하게, 그리고 술을 권할 때는 잔을 낮춰 따르는 것이 예의였습니다. 반면 서민층의 주막에서는 넉넉한 사기잔이나 사발 형태의 잔이 일반적이었으며, 돌리며 마시고, 웃으며 부딪히는 술의 태도가 문화 자체였습니다.
이러한 술의 방식은 단순한 마시는 태도를 넘어, 사회가 사람을 구분하고 관계를 조정하는 매우 섬세한 문화적 유산이었습니다. 오늘날 음주 예절에서 유독 까다로운 잔 돌림, 눈을 피하며 마시기, 손으로 가리기 등의 행동 역시 이러한 전통 속에서 계층 질서를 유지하고, 권위와 존중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자리 잡은 것입니다.
전통주로 엮인 삶 – 제례, 시, 음식이 술과 만나는 지점들
한국 전통주에서 마지막으로 조명해야 할 부분은 ‘술이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술은 언제나 의례, 음식, 문학, 정서와 함께 엮여 있었고, 그것이 전통주의 진짜 풍경을 완성합니다.
제례에서 술은 가장 중요한 매개체였습니다. 신에게 바치는 첫 음식이 술이며, 술잔을 채우고 붓는 행위가 곧 하늘과 조상을 연결하는 의식이었습니다. 지방마다 이 술의 색과 종류가 조금씩 다르며, 이를 통해 제사의 성격과 지역 특성이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경상도의 감홍로, 전라도의 이강주, 경기도의 문배술은 모두 제례용으로 사용되던 전통주였으며, 그 지역의 풍토와 재료, 의례 방식이 녹아든 결과물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한국 고전문학 속 술은 거의 항상 등장하는 주제입니다. 퇴계 이황은 직접 가양주를 빚어 학문을 논하던 자리에서 제자들과 나누었고, 정약용은 유배 중에도 ‘술은 기운을 돋우나 절제가 먼저’라며 술의 도덕적 위치를 조율하려 하였습니다. 이러한 기록들은 술이 단지 쾌락의 수단이 아니라, 시와 철학, 공동체 안에서 균형을 찾기 위한 사유의 도구였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술과 음식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습니다. 막걸리는 김치와, 약주는 전과, 탁주는 고기와 어울리는 방식으로 ‘술이 음식을 고르고, 음식이 술의 풍미를 결정짓는’ 구조가 있었습니다. 특히 전통 혼례나 잔치에서 술은 음식의 시작이자 마무리로 기능하며 사람과 사람, 그리고 삶과 삶을 연결 짓는 역할을 했습니다.
결국 전통주는 하나의 ‘문화 총합’이었습니다. 제례의 의식, 음식의 짝, 여성의 노동, 계층의 상징, 문학의 도구까지— 그 안에 담긴 세계는 지금 우리가 마시는 술보다 훨씬 복잡하고 풍성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여행자 여러분께서 한국의 전통주를 마주하실 때, 그 한 잔에 담긴 말 없는 역사와 손끝의 문화를 함께 떠올려 주신다면, 그 술은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살아 있는 문화재로 다가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