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흑산도에서 만난 자산어보 (정약전, 어류, 조선)

by see-sky 2025. 4. 15.

바다 사진

조선 후기의 실학자 정약전이 유배지 흑산도에서 집필한 『자산어보』는 조선의 자연과 학문이 만난 위대한 지식의 유산이다. 단순히 어류에 대한 관찰기록을 넘어서, 당시 섬 주민들의 삶, 생태, 조선의 자연철학, 실용지식까지 담아낸 이 백과는 시대를 앞선 실증주의 학문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자산어보』가 태어난 땅인 흑산도의 자연과 역사, 정약전이라는 인물의 통찰, 그리고 자산어보가 지닌 학문적·문화적 의미를 폭넓게 조명해 본다.

흑산도, 유배의 섬에서 피어난 실학의 꽃

흑산도는 한반도 남서쪽, 전라남도 신안군에 위치한 군도로, 조선시대에는 외부와 고립된 험준한 섬으로 악명이 높았다. 특히 정치범이나 종교 탄압을 받은 인물들의 유배지로 자주 활용되었으며, 그중에서도 정약전은 1801년 신유박해로 인해 이곳에 유배되었다. 천주교 신자로 지목된 그와 가족들은 유배 혹은 처형당하는 비극을 맞이했지만, 정약전은 불운한 환경 속에서도 지적 탐구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유배지 흑산도에서 섬 주민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하고, 직접 바닷가와 어시장을 돌아다니며 해양 생물을 관찰하고 기록했다. 정약전은 섬의 옛 이름인 '자산(玆山)'에서 따와 『자산어보』라는 이름을 붙였고, 이는 단순한 생물도감이 아니라 조선시대 해양 생태, 지역어, 어획 기술, 조리법까지 담은 종합 민속자연 백과로 완성되었다. 유배의 고독과 사회적 단절 속에서 오히려 그는 누구보다 조선 백성의 삶과 자연에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흑산도는 조수 간만의 차가 크고, 다양한 생물군이 서식하는 해양 생태계의 보고였다. 이러한 환경은 정약전의 생물 관찰에 완벽한 조건을 제공했다. 정약전은 생물의 외형, 서식지, 산란 시기, 채집법, 요리법 등을 매우 세밀하게 기술하였고, 주민들의 방언이나 민간 속설까지 함께 담아 생생한 현장감을 더했다. 이는 단순한 학문적 호기심이 아니라,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실용 지식의 축적이라는 실학 정신을 구현한 것이다.

조선의 해양 백과, 자산어보에 담긴 과학과 민중의 기록

『자산어보』는 총 3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어류를 중심으로 조개류, 갑각류, 해조류 등 총 226종 이상의 생물이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지극히 관찰 중심적이라는 점이다. 정약전은 실제 생물을 직접 보고,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기술을 남겼으며, 이는 당시의 지식 생산 방식으로는 매우 혁신적인 접근이었다.

예를 들어 그는 멸치에 대해 "흑산도 주민은 이것을 '멸청'이라 부르며, 봄과 가을 두 차례 대규모로 어획한다. 간을 하여 말려 저장하며, 육지보다 짜게 절여 보관한다"라고 적었다. 이는 단순한 어류 설명을 넘어서 지역의 어업 문화와 저장 방식, 방언 등 다층적인 민속학적 의미를 지닌다. 또한 그는 생물의 외양을 그림으로도 남겼는데, 이는 훗날 비교 동물학, 해양학에서도 귀중한 자료로 인용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정약전이 학문을 ‘백성의 삶’과 연결 지으려 했다는 점이다. 그는 학문이 추상적인 개념이 아닌, 실제 백성들의 삶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철학을 지녔다. 따라서 『자산어보』에는 물고기를 먹는 법, 저장법, 치료법까지 언급되어 있으며, 이는 그가 자연을 단순한 연구대상이 아닌 삶의 일부분으로 이해했음을 보여준다. 이는 서양의 르네상스 자연철학과 유사한 민중 중심의 과학관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또한 『자산어보』는 지식 생산의 ‘집단지성’ 모델이기도 하다. 정약전은 주민들과 수시로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경험적 지식을 존중하고 문서화했다. 당시 유교적 사대부 사회에서는 농민이나 어민의 말을 기록하는 일이 하찮게 여겨졌지만, 그는 이러한 계층적 장벽을 무너뜨리고 실용적 지식의 가치를 강조했다. 이 점에서 『자산어보』는 단순한 책이 아닌 조선 지식 패러다임의 전환점을 상징하는 저작물이라 할 수 있다.

정약전, 관찰과 기록의 실천자이자 조선 지성의 진면목

정약전은 실학자 정약용의 형이자, 정약종·정약현 등 학문적 전통이 깊은 남인 가문 출신이었다. 그의 학문적 기반은 유교였지만, 유배 생활을 통해 그는 더욱 실천적이고 경험 중심적인 지식에 눈을 떴다. 정약전이 자산어보를 집필하던 시기는 과학 기술보다 성리학적 사유가 지배적이던 시대였기에, 그의 관찰 기반 기록 방식은 상당히 진보적인 시도였다.

정약전은 물고기를 단순히 분류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과 자연, 공동체 간의 관계를 기술하고자 했다. 그는 생물을 ‘이해하고 분류하는 대상’ 일뿐 아니라, ‘공존하고 활용해야 할 존재’로 바라보았다. 이는 인간 중심의 지식 구조를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방향으로 전환하고자 한 실학의 핵심 철학이기도 하다.

유배 중에도 정약전은 자신을 단절된 존재로 여기지 않았다. 그는 끊임없이 섬 주민들과 소통하고, 그들의 삶에 관여하며, 생물 채집과 그림 작업, 기록을 병행했다. 오늘날로 치면 민속지적 조사자이자 현장 연구자, 자연과학자, 언어학자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 셈이다. 특히 한자뿐 아니라 당시 주민들이 실제 사용한 말까지 병기한 점은 오늘날의 ‘현장언어’ 연구와도 유사한 방식이다.

최근에는 영화 <자산어보>가 정약전의 이야기를 다시금 조명하면서 대중적으로도 그의 가치가 재조명되고 있다. 영화는 그가 섬 청년 '창대'(허 fictional character)를 만나 지식과 삶을 나누는 과정을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이는 실학자 정약전의 인간미와 그의 지식 철학을 생생히 전달한다. 영화와 실제 기록을 함께 살펴보면, 우리는 그가 얼마나 인간 중심적이며, 공동체 중심의 지식인을 지향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정약전은 죽는 날까지도 흑산도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유배에서 풀려난 이후에도 섬에 남기를 원했고, 결국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는 그의 삶이 그 유배가 아니라 ‘자연과 민중 속에서 살아가는 학문’을 구현하는 여정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섬이라는 외딴 공간에서, 오히려 누구보다 조선을 깊이 이해한 사람이 되었다.

『자산어보』는 단지 오래된 어류 백과가 아니다. 그것은 자연을 사랑하고, 민중과 함께하며, 지식을 실용적으로 남기고자 했던 한 실학자의 삶과 철학이 녹아든 소중한 기록이다. 흑산도의 거친 파도 소리 속에서 시작된 이 책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많은 가치를 전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정약전이 바라본 바다를 통해, 조선의 지식과 자연을 다시 만나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