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행정이 흐르고, 강물이 기억하는 나주 (강, 여성, 향토의 맛)
한반도 남쪽, 한적한 들판과 영산강이 만나는 도시에 과거의 '행정 수도'가 숨어 있습니다. 나주는 조선시대 내내 전라도를 대표하는 정치·행정 중심지였고, 고대 마한의 심장, 고려의 왕건과 조선의 선비, 근대의 여성 교육자까지 시대별 주인공들이 지나간 도시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역사가 말이 없습니다. 조용한 도시에 말을 걸면, 조선이 대답합니다.강을 따라 걷는 조선 – 나주 금성관과 목사고을의 품격나주를 걷는다는 것은 곧 조선을 걷는 일입니다. 조선시대 전라도를 대표하는 목(牧)이자, 전라도 관찰사가 머물던 정치적 수도였던 나주는 전라도 전체의 군현을 다스리던 ‘수부도시’였습니다. 지금의 말로 하면 전라남도청, 전라북도청의 본부가 동시에 존재하던 도시였던 셈입니다.그 상징이자 중심이 된 장소가 바로 금성..
2025. 5. 20.
청학동, 예절보다 오래된 유토피아의 진실 (은둔, 사상, 사람)
청학동은 ‘예절의 고장’이자 ‘조선이 멈춘 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오랫동안 세상의 바깥에서 살아가려 했던 사람들의 철학과 현실, 그리고 이상향에 대한 집단적 열망이 숨어 있습니다. 이번 여행에서는 관광지로 알려진 청학동이 아닌, 유토피아라는 이름 아래 숨겨진 청학동의 진짜 역사적 본질을 찾아가 보려 합니다.예절보다 오래된 사상, 청학동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오늘날 청학동은 ‘예절 교육장’ 혹은 ‘전통문화 체험 마을’로 소개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도포를 입은 아이들이 절을 하고, 천자문을 외우며, ‘조선 시대처럼 살아가는’ 삶을 재현하는 공간처럼 비칩니다. 하지만 청학동이라는 땅이 세상에 알려진 역사는 그보다 훨씬 오래되었으며, 예절이라는 틀보다 훨씬 더 깊은 철학적, 사회적 맥락을..
2025. 5. 18.
하늘보다 깊은 기억, 지리산 은둔의 시간들 (저항, 종교, 사라진 사람들)
지리산은 수천 년 동안 숨은 사람들, 숨긴 진실, 잊힌 목소리들이 교차하며 켜켜이 쌓인 역사적 지층입니다. 신라의 고승, 고려의 도인, 조선의 유배자,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한국전쟁의 빨치산까지… 지리산은 언제나 ‘숨은 존재’들을 품어왔습니다. 오늘은 그 은둔의 기억을 따라, 지리산이라는 가장 조용한 역사서를 펼쳐보려 합니다.도망과 도의 경계 — 지리산, 은둔의 성소예로부터 지리산은 ‘신선이 머문 산’으로 불렸습니다. 하지만 그 신선들은 단순한 전설 속 존재가 아니라, 실제로 이곳에 몸을 숨기고 살았던 수많은 역사 속 인물들이었습니다. 고대에는 고승들이 정토를 찾기 위해 이 산을 찾았고, 조선 시대에는 유배지와 유학자들의 은둔처로,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들의 피신지로 활용되곤 했습니다.지리산의 은둔..
2025. 5. 17.
바다가 기억하고, 파도가 삼킨 이름들 – 묵호항에서 건져 올린 시간
강원도 동해시 묵호항은 조용한 항구입니다. 관광객들의 발길이 머무는 묵호등대, 논골담길, 어시장만 보자면 그저 평화로운 어촌 마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곳은 한때 바다가 육지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기억했던 곳이며, 삶과 이념, 귀향과 이별이 교차했던 ‘출발점이자 끝의 장소’였습니다. 묵호항은 단지 물고기를 실어 나르던 항구가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전쟁으로 남겨진 사람들, 실향민, 그리고 해안선을 따라 사라진 이름들이 모여 머물렀던 ‘기억의 바다’였습니다. 이 글에서는 사람들이 쉽게 말하지 않는, 하지만 묵호항이 조용히 간직해 온 시간과 흔적들을 따라가 보고자 합니다.지도에도 없는 길, 묵호항이 기억하는 실향의 바다묵호항이 항구로서 본격적인 기능을 하게 된 것은 1940년대 말, 그리고 한국전쟁이..
2025. 5. 16.
거창에서 만난 묻힌 역사들(유학의 고장, 거창 양민 학살사건, 균열과 회복의 길)
경남 거창은 조용한 산골의 이미지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푸른 물이 흐르는 수승대, 덕유산 자락에 안긴 고요한 마을들, 그리고 남계서원 같은 유서 깊은 서원이 어우러져 전형적인 선비의 고장처럼 보이곤 합니다. 그러나 이 작은 고을은, 우리가 알지 못했던 크고 무거운 역사들을 품고 있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조선의 학문이 살아 숨 쉬었고, 또한 한국 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장면 중 하나가 펼쳐졌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관광지로서의 거창이 아닌, 기록되지 않았거나 말해지지 않았던 ‘기억의 공간’으로서의 거창을 함께 걸어보겠습니다.수승대 아래 흐르던 사색 – 거창, 유학의 고장이 되기까지수승대는 많은 분들께 ‘자연명소’ 혹은 ‘유람지’로 익숙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이곳은 단순한 물놀이 장소가 아니라, 조선시대..
2025. 5. 15.